나, 세상에 나온지 270일
나의 부모들도 참 뻔하고 평범한 사람들이다. 내가 언제쯤 하나, 두고 보고 있었는데 그것을 나의 부모가 오늘 하고말았다.
나를 2미터정도 떨어진 곳에 앉혀놓고 엄마와 아빠는 내가 이등변의 꼭짓점이 되도록 자신들의 위치를 세심하게 지정했다. 그리고서는 시작이다. 내 마음에 들려는 온갖 재롱들. 훈기야 이리와야지, 훈기야 여기야 여기, 훈기야 엄마, 훈기야 아빠. 바닥을 두드리고 손으로 반짝반짝을 하고, 나와 눈을 맞추기 위해 최대한 두 눈을 크게 뜬다. 나는 일단 직진을 했는데 너무 오랫동안 가만히 있으면 밤중에 이웃에게 민폐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둘의 중간 지점까지 가서 일단 양손을 뻗어 엄마, 아빠의 손을 동시에 잡았다. 그리고 엄마에게 안겼을 경우와 아빠에게 안겼을 경우 둘의 반응을 예상하기 위해 각각의 시나리오를 구성해보았다. 결국 나는 엄마에게 가기로 결심하고 엄마 다리에 올라타 안겼다.
사실 이 게임은 그리 공정하지 않다. 엄마에게 이 게임은 이겨봐야 본전이다. 엄마와 함께 보낸 시간의 총량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엄마는 가슴을 쓸어내렸고 아빠는 그럼 그렇지,라고 했다.
평화는 선한 의도와 더불어 치밀한 계산이 수반될 때에야 지킬 수 있는, 모두가 노력해야만 겨우 지속되는 아주 아슬아슬한 상태이다.
나, 세상에 나온지 271일
어제 저녁에 엄마는 아빠와 나를 집에 두고 어느 강연에 다녀왔다. 공감과 치유에 관한 강연이라고 했는데 그 내용이 아주 마음에 들었었는지 아빠에게 열의를 다해 내용을 설명했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는데, 그만 엄마가 조금 달라져버렸다.
엄마는 말도 못하는 내게 자꾸만 묻는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내가 소파를 잡고 옆으로 걷다가 넘어져 방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울면 ‘머리를 부딪혔으니 얼마나 아프겠니’라고하는데 여기까지는 평소의 반응과 다를바 없다. 그런데 이제 한마디가 더 붙는다. ‘네 마음은 어떠니?’. 내가 잠투정을 하면 ‘그래, 잠드는게 아주 힘들지, 잠 못드는 네 마음은 어떠니?’. 엄마한테 안기고 싶어서 울면 ‘엄마가 힘들어서 오래 못안아줘 미안해, 네 마음은 괜찮니?’라고 자꾸만 묻는 것이다. 나는 별 할 말이 없고, 일단 나를 좀 안아줬으면 좋겠는데 자꾸만 묻고, 또 묻는다.
상대의 마음을 묻는 것이 공감의 시작이라면서 자꾸 이러는데, 우리 엄마 제대로 배워온 것 맞나요?
나, 세상에 나온지 272일
나는 최근 급장착한 기동성을 바탕으로 온 집안을 누비고 다닌다. 몸의 전면을 바닥에 붙이고 기는 포복자세는 전과 다를 바 없지만, 속도와 체력이 향상되어 탐험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이제 우리집 안의 지리도 거의 다 파악했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나면 어디로 가서 아빠를 마중해야 하는지 알고, 엄마가 밥먹자고 부르면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안다.
추진력의 8할은 내 엄지발가락에서 나온다. 항상 땀이 옅게 배어 있는 내 엄지발가락은 방바닥을 밀어내고 내 몸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아직 보폭이 작아 수백번 바닥을 밀어내야 비로소 하루가 끝난다.
엄마는 유난히 내 발을 좋아했다. 신생아실에서 첫 수유를 할 때 속싸개에 싸여 있는 내 발을 굳이 꺼내 입을 맞추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내가 아기체육관의 발바닥 피아노를 쿵쾅거릴 때도, 처음 소파를 잡고 일어날 때도, 기어다니기 시작했을 때도 엄마는 내 발을 특별히 언급하며 여러 번 칭찬했다.
그런데 오늘은 여느 때처럼 분유를 먹고 있는 내 발을 만지고 있던 엄마가 아쉬운 표정을 보였다. 엄지발가락의 가장 도톰한 부분이 단단해지고 있다고, 무르기만 하던 발가락에 두꺼운 피부가 돋아나고 있나보다고. 무른 피부는 어릴 적 한 때라 다시 엄지발가락이 전처럼 보드라운 피부로 덮이지는 않을 거라고, 내가 그새 많이 커버렸다고.
나, 세상에 나온지 273일
우리 아빠와 삼촌들은 이름 가운데에 돌림자를 쓴다. 같은 성씨에, 돌림자를 공유하는 그들은 이름에서 단 하나의 음절로 서로를 구분한다. 아빠는 준, 아빠의 동생은 민, 아빠의 사촌동생은 상. 그들이 자신의 가족들과 모두 함께 모였다. 우리는 횟집에서 만났는데 아기가 둘, 어린이가 하나 있기 때문에 조용한 룸을 배정받았다. 일단 나는 전복죽에 밥을 말아 배를 채웠다. 구운 흰살 생선을 반찬으로 먹었다. 그리고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가끔 점프를 하며 놀았다.
어른들은 나의 육촌 형과 누나에게 조용히 하라며 한 번씩 주의를 주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정숙하라는 주의는 어른들이 받았어야 한다. 나는 태어나서 어른들이 이렇게 시끄럽게 대화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그들은 테이블에 달린 벨을 눌러 여러 번 ‘카스처럼’을 시켰다. 테이블에 빈 병이 쌓일 때마다 점점 그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나의 엄마와 작은엄마의 웃음소리가 룸 안에 울렸고 준과 민과 상의 목소리는 아마 룸 밖의 손님들에게까지 다 들렸을 것이다.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가득한 횟집의 작은 룸에서 나는 어른들이 노는 모습을 살짝 엿본 것 같다.
나, 세상에 나온지 274일
엄마와 아빠는 나를 데리고 이것저것 실험을 해보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며칠 전에는 대상영속성 실험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빨간 뚜껑의 로션통을 잡으려고 다가가면 옷으로 덮어 보이지 않게 하고서는 내 반응을 살핀다. 나는 로션통이 갑자기 보이지 않자 당황스러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로션통은 갑자기 증발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의 부모는 나에게 아직 대상영속성 능력이 없느니, 하는 말을 주고받으며 로션통 감추기를 대여섯 번 반복했다.
대여섯 번이 반복되는 와중에 그 대상영속성이라는 것을 획득해버렸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옷 밑에 감추어진 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만 깨닫고 만 것이다. 터진 울음을 겨우 그치고서 엄마, 아빠가 한 번만 더 로션통을 감추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나에게 마지막 기회는 없었다. 그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로션통을 치우고 나를 들어 안고 위로해주었다. 나에게 딱 한 번의 기회만 더 있었더라도. 분했다.
그리고 오늘이 왔다. 낮에 엄마와 둘이서만 집에 있을 때였는데 엄마가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다시 로션통을 들고 왔다. 나는 왜 이제서야,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지만 지금이라도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게 어딘가.
내가 한 두 번 성공하자 엄마는 스마트폰을 들고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내 깨달음의 결과가 널리널리 퍼지기를.
나, 세상에 나온지 275일
내 방이 생긴 이후로 나는 혼자 자고 있다. 벌써 일주일 째다. 나를 재우는 담당은 주로 엄마다. 아빠는 일찍 출근해야 하기 때문에 엄마가 나를 재워준다. 아참, 내가 매일 자정이 훨씬 넘어 잠이 든다는 건 아주 유명한 사실이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올빼미형 아기였다.
엄마, 아빠와 함께 안방에서 잘 때는 아기침대를 썼는데 이제 나는 바닥에서 잔다. 내 방에는 어른 둘이 누워도 넉넉할만큼 크고 도톰한 이불이 깔려 있다. 나는 그 위에서 전보다 훨씬 스케일이 큰 잠투정을 한다.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다. 졸려서 이성이 마비되어 버리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오늘 오전에 아빠의 부모님, 나의 조부모가 오셨었다. 그들은 내가 잠투정을 심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요즘은 어떤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내가 잠투정을 어떻게 하는지 자세히 묘사했는데 나도 그걸 듣고 나서야 내 모습을 알게되었다.
나는 울면서 머리를 이불에 박고 엉덩이를 높이 든 채로, 쉽게 말해 원산폭격 자세로 돌아다닌다. 앉아서 이불을 두들기며 갑자기 꺄르르르 웃기도 하는데 이미 많이 졸린 상태라 상체가 앞뒤로 휙휙 넘어간다. 그러다 벽에 머리를 부딪혀 쿵 소리가 난 적도 있다. 내 예쁜 목소리가 언젠가부터 갈라지는 쇳소리로 변해버린 것도 내가 자기 전에 너무 많이 울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일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아빠가 나를 재우는 데에 동참했다. 그는 먼저 뻗어버렸고, 내가 뻗었고, 그리고 엄마가 뻗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잠시나마 함께 잠이 들었다.
새벽 2시가 넘어서.
나, 세상에 나온지 276일
지금으로부터 14개월 쯤 전에 강원도에서는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그 때 나는 엄마 뱃속에 있었는데 아마 귤 하나 크기 정도의 아주 작은 아기였을 것이다. 엄마와 아빠, 이모와 외삼촌은 올림픽을 보겠다며 길을 나섰다. 우리는 강릉에서 아이스하키 경기를 보았고, 평창에서는 에어리얼 스키 경기를 보았다. 엄마는 아이스하키 경기장에서 흥미로운 플레이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에어리얼 스키 경기장에서는 선수들이 공중곡예를 돌고 착지할 때마다 콩콩 뛰어서 이틀 간 조금 심란했었는데.
오늘 다시 평창에 왔다. 우리의 첫 가족여행이다.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저녁 시간이 거의 다 되어 도착했다.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오대산으로 향했다. 다행히 아직 해는 나의 눈높이 즈음에 걸려 있었다. 유모차를 타고 숲길을 걸을 때 다람쥐가 나를 쫓아왔는데 나는 다람쥐가 처음이라 놀라 계속 바라 볼 수밖에 없었고, 다람쥐도 나를 처음 보아 궁금했던지 포르르 내 뒤를 따라왔다. 내가 아직 작아서 나를 무서워하지 않나보다. 월정사의 9층 석탑은 생각보다 높진 않았지만 절간의 기와마다 걸려 있는 매끈한 산등성이가 가까운듯 먼듯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잠자리가 바뀌어서인지 응가를 아침에 한 번 밖에 누지 못했다.
피곤하니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아기관점육아일기 #훈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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