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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미 Apr 04. 2024

애증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라는 이지선다형 질문은 세상에서 가장 답하기 쉬운 문제 중 하나였다. 반지하 집으로 이사하기 전 까진.


 나는 언제나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했다. 아빠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간혹 친구들이나 가족들 앞에서 그런 유치한 질문을 내게 직접 던지곤 했다. ‘아빠’라는 대답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물끄러미 내 입을 바라보던 아빠의 눈, 슬그머니 올라가 있는 입 꼬리에서 느껴지던 느긋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 그마저도 나는 아빠답다고 생각하며 좋아했다.


물론 엄마도 사랑했다. 하지만 엄마는 언제나 나보다 남동생을 더 좋아했고 그 사실을 구태여 숨기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면 나의 대답은 누가 더 나를 좋아하는 지를 본능적으로 계산한  공평한 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엄마에게 푸념하듯 ‘엄마는 나 보다 동생을 더 좋아하잖아’라고 말하면 엄마는 항변하듯 대답했다. ‘넌 어려서부터 손 갈 게 없는 아이라 그랬지. 준비물 한 번 챙겨준 적 없어도 알아서 잘했으니까.’라고. 엄마에게 나는 사랑하는 자녀이자 동시에 얼마간 마음을 제쳐 둘 수 있는 아이였다. 어린 자녀들을 집에 두고 바깥일을 하는 여성이 느낄 부채감, 그것으로부터 얼마간 자유를 누리게 해주는 존재이자 자신의 짐을 덜어주는 시근 있는 맏딸. 그러다 가끔은 기대고 싶은 대상이 바로 나였다.


  엄마가 나로 인해 안심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알아서 잘했기 때문에 마음을 덜 쓸 수 있다는 엄마 식 칭찬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구석이 있었다.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사랑을 받으려면 제 몫을 해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비록 엄마가 내게 준 사랑은 귀한 것이었다고는 하나 내가 받고 싶었던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기대나 믿음이란 단어보단 보단 무구하고 무조건적인 사랑. 나는 그런 걸 원했고 그걸 주는 쪽은 아빠에 가까웠다.


  반면 아빠에게 나를 좋아하는 이유를 따로 묻진 않았지만 그런 질문을 했다고 해도 아빠는 다른 말을 보태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딸이니까, 사랑하는 거지.'라고 대답했을 게 뻔하다. 내가 아는 아빠는 그런 사람이니까. 사랑은 많지만 이유를 물으면 명확히 말하지 못하고 넘치는 애정에 책임감은 없는, 감정이 풍부해 때때로 감상적이 되지만 그래서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 그게 바로 나의 아빠였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아빠의 그런 태도는 사려 깊지도, 완전한 사랑에 가까운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아빠의 불완전성이 더 도드라진다고나 할까. 확실히 아빠의 사랑의 이면에는 모순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면이 있었다. 어느덧 아빠와 엄마가 나를 낳았던 나이를 지나온 지금. 나는 아빠가 말하는 사랑에는 진심도 있었지만 깊이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는 태도와 현실 도피적인 모습에서 기인되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이유야 무엇이건 나는 그런 아빠를 사랑했는데, 아빠와는 다르게 나는 아빠를 좋아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들 수 있었다. 이건 다시 말해 아빠가 나를 사랑하듯, 그냥 아빠라서 좋아하는 마음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존경하고 동경할 만한 부분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아빠는 조금씩 모양이 다른 안경이 백 개가 넘었다. 주말엔 섬으로 들어가 낚시를 해 고기를 잡아오기도 했고 어느 날엔 먹을 갈아 하루 종일 글을 쓰기도 했다. 삶에서 돈 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음을 알았고 아빠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사실을 책과 글, 사진과 시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려 했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예상하는 대로 흐르지 않고 간절히 원하는 마음과는 상관없이 아름다움 꿈이라 할지라도 바래고 누추해질 수도 있다.


우리 가족이 반지하 집으로 이사 가던 날. 작은 대문 밖으로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한 짐들이 삐져나와 있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 짐들의 대부분은 아빠의 것이었는데 색과 모양이 크게 다르지 않은 옷가지들과 안경, 그리고 언제 했는지 모를 표구 액자가 그것이었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세로로 긴 모양새의 액자 속에는 윤동주의 ‘서시’가 쓰여 있었다. 그 액자는 동생과 내가 한글을 익히기도 전부터 집의 벽 한가운데, 가장 좋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유년의 많은 날 액자 속에 적힌 시를 가로로, 세로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내려가던 우리 남매. 우리는 그것이 시 인 줄도 모르고 오랜 시간을 중얼거리곤 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대문 밖에 반틈 삐져나온 서시의 첫 문장을 보며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바깥에 내던져진 예술적인 감수성이, 세상 물정 모르고 삶의 아름다움만을 찬양하는 무구함의 결과치곤 초라했다. 내가 동경하고 사랑했던 아빠의 성정의 마침표가 이것이라 생각하니 나는 더 이상 멋진 옷도, 시도, 아빠조차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빠는 얼마간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많은 이들이 대단하게 여기지 않고 때론 무용하다고 까지 말하는 멋과 예술, 유흥을 아는 사람이라는 인식에서 오는 고고함이랄까. 그런 자부가 아빠의 얼굴에 늘 깃들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세가 기울고 아빠가 아빠로서 가질 수 있는 권위를 잃은 순간 나는 더 이상 아빠의 얼굴을 이전처럼 바라보지 못했다. 아빠를 사랑했던 만큼 아빠를 미워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 가족의 가난과 어려움이 과연 오롯이 아빠의 탓이었을까.

어쩌면 나는 쉬운 대답을 찾기 위해 아빠의 무능을 인질로 삼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시간이 흐르고 머리가 자라나면서 내가 문학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그것이 꼭 아빠다움인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새겨진 아빠의 영향인 것만 같아 몸서리를 쳤다. 그런 것들을 사랑하게 되면 가족을 불행하게 만들지 모른다고. 조금 더 이성적이고 냉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며 그것들로부터 멀어지려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나와 다르게 동생은 기어코 그림을 그리는 삶을 선택했고 아빠와는 다른 방식으로 무던히 그 길을 갔다. 어쩌면 그건 반쯤은 운명이었고 반은 결핍에 대한 반항이지 않았을까. 결국 나 역시 돌고 돌아 다시 글의 자리로. 글을 쓰는 삶을 살기로 선택하게 된 것을 보면 완전히 틀린 추론은 아닌 것 같다.  


비록 부유함과는 멀어졌지만 잎 새에 이는 바람을 느끼고 그것에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삶을 살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이 아빠 덕분이다. 아빠가 걸어두었던 서시. 시를 읽고 자라난 남매가 이렇게 살게 된 것,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지금. 나는 더 이상 아빠를 미워하지 않는다. 되려 우리처럼 살아보지 못하고 고작해야 반지하 방에 걸어둔 시를 보며 자족해야 했던 아빠의 삶이 애처롭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 남매는 다시 아빠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 아니. 사랑보다 더 큰 마음으로 이제는 아빠를 이해하게 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집에는 윤동주의 서시는 없다. 두 번의 이사를 거치며 액자는 버려졌고 아빠는 50대를 지나 본격적으로 다시 서예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해가 거듭되며 새롭게 쓴, 더 멋들어진 표구들로 아빠의 벽은 채워졌다. 내겐 윤동주의 서시가 들어있던 액자와 현재 벽에 걸린 글의 차이는 알 수 없다. 그저 새로운 글이, 새로운 다짐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교체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이젠 내가 알고 기억하는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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