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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미 May 30. 2024

난간의 경계에서 2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종명과 다시 연락이 이어진 건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이 끝난 뒤였다. 


인생의 과업처럼 느껴지던 수능이 끝나자 우리의 삶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 같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일 때 보이지 않던 각자의 욕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대학 합격 소식이 연일 이어지는 가운데 친구들은 소위 말하는 자신의 위시리스트 항목들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수능 끝나면’이라는 말 뒷자리로 미뤄둔 일들. 가령 쌍꺼풀 수술이라든가, 운전면허증을 따면서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는 아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몇몇은 벌써 성인이 된 마냥 술과 유흥을 즐기기도 했고, 그렇게 까진 아니어도 가능한 시간을 헐겁고 낭비하는 태도로 쓰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수능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했다. 모두들 그럴 수 있다고 여겼고  그래도 되는 시절이었다. 아마 저마다 속사정은 복잡했을 것이다. 변화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된다는 사실 앞에서 대부분의 또래 친구들은 미래를 낙관하는 듯했고, 가끔은 들떠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부푼 마음을 지녔기 때문일까. 그 해 11월과 12월은 내가 경험한 겨울 가운데 가장 따뜻하고 분주했던 기억으로 남았다. 


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친구들은 각자의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편의점이나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친구들은 횟집이나 고기 집에서 서빙을 하거나 불판을 닦았다. 장소만 다를 뿐, 우리가 하는 아르바이트의 모양이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시간과 돈을 치환하는 것. 단순한 노동에 남는 시간을 보태면 최저임금으로 계산한 월급을 받는 구조는 같았다.


나 역시 수능이 끝남과 동시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쌍꺼풀 수술이라든가 운전면허증 같은 새로운 무언가를 위함은 아니었다. 성인이 된다는 건 더 자유로워진다는 이야기인 동시에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내겐 언제나 자유보다 책임이, 설렘보단 두려움이라는 말이 더 컸으므로 아르바이트는 미래의 나를 책임지기 위한 당연한 과정 중 하나처럼 느껴졌다. 당시 고등학교에서 받고 있던 지원이나 국가에서 제공해 주는 서비스는 성인이 됨과 동시에 종료될 것이었다. 그러니 그간 무상으로 제공받았던 참고서나 부가적인 지원이 끊긴 자리를 나의 시간과 노동으로 메꿔야 한다는 건 예상 가능한 미래였다. 


내가 구한 첫 아르바이트는 동네 볼링장의 카운터 업무를 보는 일이었다. 볼링장은 집에서 멀지 않은 재래시장 안, 오래된 6층짜리 건물의 6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면접을 보러 갔을 당시 인계받은 업무는 간단했다. 오후 5시 출근해 걸레를 빨고, 걸레를 널고 걸레를 개켜두기. 시재금을 맞춘 뒤 커피 자판기에 믹스 커피를 채워 넣고 카운터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것. 볼링 클럽 회원들이 구매하는 쿠폰에 도장을 찍고 커피를 심부름을 하고, 화면에 잘못 입력된 점수를 수정해 주는 일. 공식적인 업무는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외 기타 등등, 볼링장에서 일어나는 작고 사소한 일 또한 모두 내 몫이라는 걸 깨닫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작은 임금일수록 네 일 내 일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걸 나는 비교적 빨리 배운 셈이다. 


다섯 시 반에 출근해서 마지막 손님이 나가야 끝이 나는 엉성하고 다분히 착취적인 구조의 일자리. 그럼에도 나는 불판을 닦거나 무거운 그릇 서빙을 하는 것보단 육체적인 노동 강도가 약하다는 것에 만족하며 약 반년을 볼링장에서 일했다. 회원들의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옅은 성희롱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명확한 출근시간과는 다르게 퇴근시간을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은 6개월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고 매번 나를 괴롭게 했다. 


퇴근 시간은 마지막 손님이 나가는 순간을 기준으로 정해졌다. 빠르면 열두 시 반에서 한 시. 대체로 그 언저리의 시간대에 집에 갈 수 있었지만 가끔 술에 취한 손님이라도 오는 날이면 퇴근이 한시 반 두 시를 넘어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 가로등만 켜진 좁은 골목을 홀로 걸어갈 때면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무서워서도 힘들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나는 그 밤들이 이상하게 서글펐다. 잰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면 불이 켜지지 않은 반 지하 문을 열어야 한다는 사실이. 내게 다가올 봄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음이. 가끔을 슬펐다가 이내 겁이 나는 밤들이 이어졌다. 


고요하고도 확실한 새벽의 시간. 엄마와 아빠, 동생이 모두 잠든 집은 내 집이면서도 집 같지 않았다. 눈을 뜨면 여전히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갔지만 저녁이면 그 밤을 혼자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피로함이 몰려왔다. 그렇게 낮보다 밤의 길이가 길게 느껴지던 어느 날. 당시 메신저로 초등학교 6학년 때 단짝이던 지연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지연은 중학교에 들어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안으로 이사를 간 친구였다. 자정이 넘은 시간. 메신저로 인사를 건넨 지연은 오랜만이라며, 어떻게 지내고 있냐며. 특유의 지연다운 붙임성이 서린 안부를 건넸다. 이제 수능도 끝났겠다, 비로소 여유가 생겨서 잊고 지낸 친구들 생각이 났노라 말하는 지연은 메신저를 통해 6학년 때 친구들을 하나씩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 말에 잊었던 유년의 기억을 더듬고 있는 순간, 지연은 내게 선들한 태도로 물어왔다. 


“참미야. 종명이 기억나? 너네 둘 짝지였잖아,”


종명.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종명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종명이 남고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같았으나 확실한 정보는 아니었다.


‘그래. 종명이. 우리는 짝꿍이었지.’


순간 종명과 나란히 앉아 마이마이 속 지오디 테이프를 듣던 날의 기억이 홀연히 마음에 떠올랐다. 

'종명은 잘 살고 있을까. 아마 잘 살고 있겠지. 좋은 대학에 들어갔을 거야.'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종명의 모습은 꽤 유복하고 다복한 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막연히 종명이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거나 꼭 대학이 아니더라도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꿈을 이루면서 살고 있으리라 여겼다. 그리고 그때 지연은 내게 말했다. 


“지금 종명이랑 얘기하고 있는데, 참미 너도 채팅방에 들어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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