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모님은 요양원에 삽니다

치매 부모님이 요양원에 가시게 된 이야기

by 맑은눈빛연어

나는 다섯 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 내 세상은 언제나 언니, 오빠, 남동생의 그림자에 둘러싸여 있었다.

막내는 작고, 눈치 빠르고, 때론 부모보다 형제에게 더 크게 혼나는 법이다.

그래도 나는 자유로운 공기를 품고 자란 딸이었다.

그런 내가 처음 혼자 세상으로 나가던 날, 아버지는 내 두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얘야, 사람이 제일 무섭다. 세상에 결코 휘둘리지 말거라."


돌이켜 보면, 아버지의 그 말은 내가 인생에 휘둘릴때마다 나를 붙들어 준

나침반이었다.

가끔은 흔들렸고, 몇 번은 엎어졌지만, 그 문장은 늘 나를 일으켜 세웠다.


엄마는 늘 누군가의 엄마였다


우리 엄마는 당신의 인생을 가족에게 통째로 내어준 사람이었다.
시부모를 모시고, 다섯 자녀를 낳아 기르고, 그 자녀들의 아이들까지 돌봤다.

특히 언니들의 커리어를 지켜주고 싶다며 손주 셋을 스스로 돌보셨다.
그래서 언니들은 지금도 단단히 사회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나는 내 아이는 스스로 키우겠다며 잘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다.

그 결정을 누구보다 아쉬워하신 분이 엄마였다.
"너도 할 수 있는데... 그걸 왜 네가 포기하니..."
엄마는 나를 응원하면서도, 속상해했다.

엄마가 지켜온 것은 우리 가족의 미래였고,

나는 그 미래를 조금 다르게 선택한 딸이었으니까.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멀어진 시간


결혼 후 나는 종손댁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명절이면 어김없이 시댁의 제사를 준비했고, 친정에는 단 한 번도 명절에 가지 못했다.
“다음엔 꼭 갈게요, 엄마.” 그렇게 몇 번이고 미뤘다.


공직자인 남편의 보직은 자주 바뀌었고, 나는 아이를 안고 제주와 부산을 오갔다.
부모님께 전화는 드렸지만, 나의 안부를 전하는 것도 바빠 당신들의 안부는 종종 놓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간암 진단을 받으셨다.
간의 일부를 떼어내는 대수술을 하셨고, 이후 매년 네 번 서울 병원을 다니셔야 했다.
그때마다 서울에 사는 작은언니 집에 머무르셨고,

나는 덕분에 병원에 함께 다니며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참 이상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오시는 길이었지만, 나는 그 시간이 감사했다.
멀어진 마음이 다시 가까워지는 통로 같았다.


그해 겨울, 낯선 싸움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흘러 수술의 예후도 좋았고, 엄마는 더 이상 서울에 오지 않으셨다.
가끔 통화하거나, 1년에 두어 번 고향에 내려가 뵙는 정도였다.
하지만 부모님의 모습은 예전과 달랐다.
우리 가족에게 큰 방을 내어주시고,

침대가 있는 작은방에서 주무시던 부모님.

평생 다툼 한 번 없었던 두 분이 밤늦게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날 나는 알 수 없는 묘한 불안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다섯 자녀를 모두 고향집으로 불렀다.

우리가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는 갑자기 엄마를 향해 의심을 쏟아냈다.
엄마는 아버지의 말을 부인했고, 상처 받은 눈으로 바라보셨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제야 우리는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치매 초기 증상으로 의심과 망상이 섞인 상태였고,
엄마 역시 간암 수술 이후 당뇨와 신장 질환, 경도 인지 장애를 거쳐

서서히 치매로 진행되고 있었다.


함께 살아도 함께가 아니었다


두 분의 치매 증상이 달라 처음엔 각각 다른 요양원에 모시게 되었다.
낯선 공간, 낯선 시간, 서로 다른 증상 속에서 부모님은 점점 멀어졌다.

어느 날 아버지의 증세가 잠시 호전되며, 결국 두 분을 같은 요양원에 모시게 되었다.

나는 매주 서로 다른 요양원을 다니다가 그때부터 같은 요양원에서 두 분을 뵙고 있다.

아버지는 혼자 다른 요양원에 계실 때보다 매일 엄마를 볼 수 있는 같은

요양원에 계셔서 그런지 전보다 휠씬 안정되고 편안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

갈때마다 계절에 맞는 간식을 챙겨가고,

아버지의 손을 어루만지고, 엄마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부축한다.

아버지는 청력 저하로 거의 들을 수 없게 되셨고, 몇 달 전엔 골절로 수술을 받으셨다.
두 달 간의 입원과 4개월동안 방문 재활 치료를 받으신 지금은 휠체어를 직접 움직이시고,

화장실도 스스로 다녀오신다.
엄마는 여전히 걷는 것이 불편하다. 그래서 2년 간 골다공증 주사 중에선

가장 효과가 좋다는 이베니티 주사를 맞기 위해 매월 모시고 다녔다.


나는 오늘도 언니들과 함께 병원에도 모시고 가며,

돌아가며 부모님의 일상을 함께 돌본다.
어느새 우리 인생도 반쯤은 그 안에 들어와 있다.


나는 오히려 요양원에 감사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부모님을 요양원에 보내면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안다.
누군가 한 사람이 부모를 집에서 모시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을 고스란히 내어주는 일이었다.

지금의 요양원은 삼시세끼와 안전이 보장되는 곳이다.
병원 진료가 가능하고, 긴급 상황에도 누군가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곳.
부모님을 매주 찾아뵙고, 손을 잡고, 눈을 마주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어쩌면 지금 우리 가족에게는 가장 다정한 형태의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모님은 지금 요양원에 삽니다.

나는 오늘도 그곳으로 향합니다.
봄이면 딸기를, 여름엔 참외를, 가을엔 밤을, 겨울이면 호빵을 들고요.
아버지의 주름진 손등을 어루만지고,
엄마의 말없이 깊은 눈을 바라보며,
나는 매주 한 번, 다시 부모님의 딸이 됩니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