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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솔 Feb 23. 2017

140분의 방관: <아무도 모른다>

출처: 영화 아무도 모른다


한 가족이 아파트에 이사를 온다. 이웃들은 엄마와 아들 한 명이 전부인 줄 알지만 3명의 아이가 더 있다. 이들은 아파트 규칙상 5명이 함께 사는 것을 비밀로 했고 행복한 새 출발을 꿈꿨다. 순조로운 듯했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각각의 규칙을 줬고 그들은 역할에 충실하며 집 안에서의 행복을 지켜나갔다. 사실 네 명의 아이들은 아빠가 모두 다르며 학교도 다니지 않는다. 어느 날 엄마는 돌연 돈과 편지를 남기고 어디론가 떠났다. 장남이자 유일하게 집 밖을 나갈 수 있는 아키라(야기라 유야)는 동생들을 잘 부탁한다는 엄마의 메시지에 그들을 돌보며 생활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평소대로 틀 안에서 잘 살아갔지만 곧 돈이 떨어지고 일정한 생활 패턴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 감감무소식인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 거란 확신이 커지는 힘든 상황에도 아이들은 서로를 아끼고 도우며 의지했다. 방 안이 세상 전부인 그들이 너무 귀여워 그저 안쓰러웠다.




아무도 모르지 않는다

봄이 되자 아이들은 밖으로 나간다. 집 안에서의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뛰어노는 이들은 영락없이 해맑다. 영화의 배경에 여름이 시작될 땐 관람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아이들은 요금 미납으로 인한 단전 단수에 몸도 옷도 잘 씻지 못한다. 늘어나 쇄골이 다 보이는 티셔츠, 한여름의 찌든 때, 공원에서의 빨래.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떤 환경에 처한 아이들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아무 관계도 없는 아이들을 돕는 게 의무는 아니다. 하지만 매일 이들을 마주하는 편의점 직원들, 아파트 주인, 동네 사람들 중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더러운 아파트 방에 방치된 아이들을 아무도 몰랐던 게 아니라 아무도 모르려고 했다. 함께 공존하는 척하며 살아가는 어른들의 모습이 점점 영화를 보는 관객을 덮친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나름의 방법으로 웃고 있는 아이들을 보기가 부끄럽다. 특히 어느 정도 자란 아키라와 둘째 교코는 평범한 아이들처럼 학교를 다니고 미래를 위해 공부하고 또래와 노는 일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들에겐 하루를 살아내는 게 더 중요했다.




악취 풍기는 보석

뙤약볕이 숨 가쁘도록 지배하던 여름의 날, 막내 유키는 결국 차갑게 눈을 감았다. 아키라와 친구는 유키의 소원이었던 비행기를 보여주기 위해 하네다 공항 공원 주변에 유키를 묻어준다. 어두운 밤에 죽은 동생을 묻으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딱딱한 흙을 파는 아키라의 모습에 할 말을 잃는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흘러나온 노래에 결국 눈물을 흘렸다. 이 가사 때문이다. 악취 풍기는 보석. 가련한 네 명의 아이들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유키의 죽음 뒤에도 아이들은 덤덤히 산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영화의 배경인 실화 '스가모 어린이 방치 사건'과 관련해 오랜 시간 동안 조사했고 15년 넘게 초고를 다듬은 뒤 이 영화를 내놓았다.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잔잔하고 천천히 흐르지만 상황만 나열하면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다. 그래서 더 잔혹하다. 아마 관객이 방관자가 된 것처럼 죄의식에 사로잡히길 바라며 감독이 그린 큰 그림일지도 모른다. 야기라 유야의 성숙하고도 미성숙한 눈빛은 연기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최고였다. 불안함과 무기력, 상실과 책임감을 지닌 어린아이 그 자체였다.



 

스가모 어린이 방치 사건


실화는 언급하기 끔찍하다. 실제로 엄마는 5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중 차남은 병사했다.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매장 허가를 받지 못한 엄마는 죽은 아이를 비닐에 싸서 악취제거제와 함께 벽장 속에 넣어뒀다. 엄마가 떠나고 셋째가 죽게 되자 14살 장남은 어른들에게 알리지 못하고 엄마가 했던 그대로 동생을 벽장 속에 두게 된다. 보관이 미숙해 악취가 나자 결국 여행가방에 넣어 공원에 버렸다고 한다. 나무로 치면 가장 여린 잎이 돋아나는 시기인 아이들이 겪은 무참한 일들. 믿기지 않지만 현실은 식어 버린 유키처럼 차갑다. 우리는 아이들을 보호하고 새싹을 틔울 수 있도록 거름을 줄 필요가 있다. 현재와 미래를 지키고 더불어 사는 세상에 윤기를 바르는 희망적 행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도 모른다>는 슬픈 무지개를 색칠해 준 하나의 붓이 되었다. 많은 이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줬을 테니 말이다.   





요즘 누군가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는 영화들이 많다. <문라이트>나 <맨체스터 바이더 씨>가 그렇다. 영화가 끝나면 한 인물의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 겪은 기분에 잠기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도 모른다>는 보면 볼수록 관객을 동떨어지게 만드는 영화다. 아프게도 순수한 아이들이 아무도 모르게 살았던 약 1년의 이야기를 모두가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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