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체 박찬욱 주간
그냥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던 때였다. 무심코 본 영화에서 희망을 버리라고 한다. 실패만 해온 인생에 가진 건 희망 뿐인데 그걸 버리라니! 무력해졌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자 무력감이 홀가분함으로 바뀌었다. 내게 희망은 희망 자체로 존재한 게 아니라 희망마저 없으면 어떡하냐는 두려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집착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인간을 절망에 빠트려놓고 그 안에서 스스로 일어나도록 한다. 우울한 분위기의 박 감독 필모그래피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갑자기 너무 발랄한 듯했지만 밝은 기운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좋았다. 아주 많이!
주인공 영군(임수정)과 일순(정지훈)이 주는 위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다. 영화에 마음이 깊어진 나는 영화를 본 다음날 영화 촬영지인 부산 '금강식물원'을 찾아갔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촬영지는 많은 곳이 공개돼있다. 굳이 식물원을 찾은 이유는 일순이 훔치기를 하는 원예치료실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식물원 내 온실이다.
나를 둘러싼 푸르른 식물들은 신세계 정신병원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선인장이 인사하고 풀 뒤에서 어떤 존재가 숨어 있는 것 같은 느낌들은 분명 영화를 보고 간 탓이겠다.(영화에서 신세계 정신병원은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는 공간이다) 조금 과장된 상상을 고백하자면 온실 내에 사진 동호회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영화 속 사람들이 그렇듯(뒤로 걷기, 반복된 행동 하기 등)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움직임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 날만큼은 식물원 관람 온실이 환상의 세계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안경과 카메라 렌즈에 김이 서려 추운 바깥 현실은 잊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 일순은 안티소셜(Antisocial,반사회적 인격장애)이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스스로 신세계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는 자신이 점점 작아서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도벽으로 공허함을 채운다. 다른 사람의 능력, 특징도 훔칠 수 있다고 믿는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돌다 내 마음대로 행동해도 좋을만한 곳을 골라 내 마음대로 해버리는 것. 일순이라는 캐릭터는 마치 나의 어떤 부분을 덜어 놓은 듯했다.
영군이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사이보그라 믿는 영군은 할머니를 끌고간 하얀맨(의사)들을 죽여야 하지만 인간적인 감정들 때문에 복수하지 못해 고민이 많다. 미워하는 사람을 대하는 나의 모습과 닮았다. 훔치기를 잘하는 영군에게 동정심을 가져가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에 많이 공감했다. 누군가 어설프게 착한 나의 마음을 단호하게 만들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정심을 빼앗긴 영군이 하얀맨들에게 총알을 무자비하게 쏘아대는 액션신(?)이 얼마나 후련했는지 모른다.
이 글의 첫 문장에서 말했듯 이 영화를 처음 만났을 때 나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도 못하고 혼자선 되는 게 없던 때, 모든 게 못난 나의 탓인 것 같아 자책만 했다. 불안감에 쫓길 때면 몸이 쪼그라들어 없어질 것 같았다. 이 영화는 자신이 사이보그여서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영군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밥을 먹게 되는 이야기다. 그렇다 보니 '밥을 먹어야 한다'는 대사가 계속 나온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영군이 밥을 먹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 굉장한 위로가 됐다. 일순은 노래 실력을 훔쳐 영군에게 다정한 요들송을 불러주고, 영군의 시선에 맞춰 몸에 배터리를 갈도록 도와준다.(영군을 위해 그런 척을 하는 것) 또 싸이보그여도 밥을 먹을 수 있다고 독려한다. 그러면서 본인의 어릴적 트라우마도 극복하게 된다. 어떤 사회에선 돌연변이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나도 치유될 수 있다는 것.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영화가 주는 메시지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영화 여행 또한 큰 위로가 됐다. 영화 배경지라는 특수성을 제외하고 공간 자체로도 충분히 일상에 환기가 된다. 실내라는 생각과 달리 국립공원을 축소시켜 놓은 듯 넓고 아름다운 야외 공간은 몽환적이었다. 겨울의 식물원은 꽁꽁 얼어 있었다. 그 풍경도 좋았지만 푸른 계절도 궁금해졌다. 다음에 다시 찾을 것을 다짐하며 식물원을 나왔다. 답답함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보고 금강 식물원을 가는 코스를 추천한다.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 중 한 줄기는 당신에게 닿을 것이다. 그것을 맞고 조금의 힘을 얻어 쓴 글을 이만 마친다.
영화_싸이보그지만 괜찮아 (I'm a cyborg but that's ok, 2006)
감독_박찬욱
주연_임수정, 정지훈 등
여행 장소_부산 금강 식물원(부산 금정구 장전2동 산43-1)
비용_ 성인 입장료 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