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둘째 주
03.11 월요일
여행이 끝이 났다. 여행 가기 전에 분주히 나가며 미처 정리하지 못한 방이 1주일이 지나도 그대로다. 내가 하노이의 불빛 속을 걷고 있을 때도, 슬리핑버스에서 몽롱하게 눈을 뜨고 있을 때도, 사파의 안갯속을 헤매고 있을 때도 내 방은 늘 그대로였을 생각을 하니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여행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내방이 마치 말을 거는 듯하다. “안녕? 잘 다녀왔어? 기다렸어.”
03.12 화요일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적응해서 일을 해나가고 있다.
03.13 수요일
더 이상 외부의 것들로 나를 어지럽히게 두지 않는다. 각자의 몫은 각자의 몫으로 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한다. 그러기로 내가 선택했다.
쳇 gpt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내 인생이 바뀔 것 같다.
03.14 목요일
아침에 40분 빨리 출근을 했다. 출근을 해서 미뤄둔 쓰레기를 종량제에 옮겨 닮았다. 담다가 봉투가 터져 안에 있던 원두 가루가 사방팔방 튀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빗자루로 쓸어 담았다. 사무실에 청소기를 한번 돌렸다. 먼지가 가득했다. 그리고 아침에 사 온 보리차와 옥수수를 소분해 담았다. 그러자 한두 명씩 출근을 했다. 아무도 모르게 내 아침은 산뜻하게 시작됐다.
03.15 금요일
정원에 목련이 피었다. 진짜 봄이다.
올해 가장 잘한 소비=시장에서 할머니를 주려고 산 5,000원짜리 꽃
03.16 토요일
그렇게도 짙고 끝이 없을 것 같은 안개는 난생처음 봤다. 여행하기 좋은 시기라던 사파의 3월은 여행하는 내내 짙은 안개와 가끔 흩뿌리는 빗방울로 우리를 환영했다. 계단식 논 뷰가 예술이라던 사파 호텔에서 맞은 첫 아침. 논이 어디고 하늘이 어딘지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는 시시각각 변했다. 같은 곳에 서 있어도 단 몇 초 사이로 볼 수 있는 게 달라졌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다가, 조금 있다가는 저 앞의 집 한 채가 보이고, 조금 더 기다리면 계단식 논의 바닥이 보이고, 그다음은 이층, 삼층, 사 층 순으로 보이는 식이었다. 우리가 있는 동안에 하늘까지 맑게 개인적은 없지만 우리는 논밭의 실루엣을 보는 것으로도 감사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가 계속되고 우산을 쓰기도 그렇다고 안 쓰기도 애매한 빗속을 걸어 다닌다는 건 여행자로서 결코 환영할 만한 날씨는 아니었지만 되려 안개 덕분에 그 도시가 더 신비로워 보였다. 또한 주변이 선명히 보이지 않았기에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몸짓에, 말소리에 더 집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