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찬집 Jan 09. 2018

늙음의 미학

늙는 다는 것은

나이가 많다는 것은 요절(夭折)의 불행을 면했다는 뜻을 함축한다. 요절이 왜 불행이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꽃도 피기 전에 봉오리 상태에서 떨어졌다면 역시 아쉽고 슬픈 일이다. 요절이 불행이라면 장수(長壽)는 자동적으로 축복이라고 말해도 되는 어법이다. 젊어서 한때 올곧게 산다고 칭송받던 사람이 늙어가면서 추태를 보이는 예는 적지 않다고 하니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다. 

사람은 30세를 넘기 기전에 죽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 괴테에 대하여 공감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내 나이 20대 초반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러나 나 자신이 30세 이전에 죽었으면 하고 바라지는 않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을 남긴 우리 조상들은 산다는 것 자체를 축복이라고 느낀 것은 낙천(樂天)의 가진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기에 그 후손들은 거지의 노래 ‘장타령’ 을 부르면서도 춤을 덩실덩실 추지 않았는가?

슈바이처가 역설했듯이 모든 생명은 경외(敬畏)높고 귀중하다며, 산다는 것 자체가 축복임에 틀림없으며, 되도록 오래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론이 힘을 얻는다. 그러나 하나의 생명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생명을 먹어야 하는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을 생각 할 때, 장수 그 자체가 축복이라는 주장은  곧  생명은 모두 살아야 하는 대 명제 앞에서 다른 논리에 충돌된다. 

생명의 단순한 연장 그 자체보다도 삶의 과정에서 무엇인가 뜻있는 일을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주장이 그래도 장수의 명분을 찾을 수 있다. 한 사람의 삶의 가치는 그가 몸담은 사회를 위하여 얼마나 이바지했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말하는 흔해 빠진 거리의 철학자들에게 그래도 경의를 목례를 보내게 되는 요즘이다. 

삶의 현장은 치열한 생존경쟁의 수라장이다. 살만치 산 시니어들이 죽지 않고 남아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이른바 ‘ 지금의 고령화 사회’를 오늘의 젊은이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버스나 지하철에 마련된 ‘노약자 보호석’을 바라보는 늙은이의 마음은 은근히 착잡하다. 늙은이들의 자신들에게도 젊었던 날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까닭에 오늘이 서글프고, 젊은이들은 그들에게도 늙을 날이 찾아온다는 곧 찾아온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않을 까닭에 젊은이들은  오늘의 즐겁다.

시니어 동창생들이 모이면 젊어서 화려했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그러나 그 한 때뿐이고 해어지면 다시 적막한 시간이 다가 온다. “노으라 젊어서 노라아, 늙어지면 못노오나니 ……”

이 노래 말에 담긴 인생관에 공감을 느꼈던지, 우리 조상들은 이 노래 가락을 즐겨 불렀다. 그러나 놀이는 결코 젊은이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며, 슬기로운 사람들은 늙은 뒤에도 놀이 의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 

‘늙어지면 못 논다’는 초초한 마음으로 놀이에 지나치게 열중하면 이 것 또한 이익보다 손해가 많고 

시니어의 스타일에 먹칠을 된다.

놀이의 본질은 즐거운 마음으로 시간을 보냄에 있으며, 즐기면서 하는 일 가운데 놀이가 있는 것이다. 

한라산에 자주 오른다. 백록담 바로 앞 등산로에 늙은 주목(朱木)군락지에 지금도 몇 그루가 남았다. 제주도 말로 쿠상 나무라고 한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고 자랑하는 쿠상 나무다.  이 주목(朱木)은 생명의 기한을 마치고 나무에 껍질(皮)가 다 벗겨져서, 생명의 없는 이 나무는 반들반들하게 윤기를 내면서 천년동안 품위를 지키다가 사그라지는 것이다. 늙을수록 더 멋있어 보이는 것은 주목만이 아니다.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도 그렇고 바닷가의 삭풍(朔風)을 이기고 살아남은 노송도 그렇고 우리 집 마당 돌담에 붙여 놓은 풍란도 늙을수록 가치와 품위를 더 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거목(巨木) 닮은 지도자는 과거만큼 찾지 못한다. 내가 유년시절, TV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사상계” 월간 잡지 하나면 우리 한국 사회를 조망 할 수 있던 시절에는 거목 같은 지도자는 우리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왜? 우리의 지금은 이리  왜소(矮小)의 길에서 옥신각신만 하는가? 

옛날 어느 절의 고승이 자신의 임종을 예연 하였을 때, 많은 제자와 신도들이 머리맡에  모여 앉았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떠나는 사람의 얼굴이 너무나 평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고종명(考終命)을 오복의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준비하는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