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가슴
컴퓨터 모니터와 마주 앉아 있는지 거의 한 시간,
닭 집에서 빠져나온 병아리를 잡기위해 온 마당을 헤매는 꼴이다 금세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머릿속에서만 뱅뱅 도는 생각, 엉덩이를 들썩일 때마다 의자 삐걱거리는 솔가 귀에 거슬린다. 모니터에서 눈을 들어 벽에 사진을 고정시킨다. 퇴색한 벽지가 부옇다. 부연 벽면이 동공에 빨려드는 듯 머릿속마저 부연해짐을 느낀다.
머리를 흔들다가 눈을 감는다. 어둠이 눈앞을 가로 막더니 조금씩 일렁인다. 일렁이는 물결너머로 보이던 희미한 빛이 다시 어둠에 휩싸이고 만다. 한참을 기다려도 매 일반이다.
조심스럽게 눈을 뜬다.
눈앞에 모니터가 흐릿하다. 시선을 돌려 벽시계를 본다, 초침은 물론 분침도 시침도 흐릿해 몇 시 몇 분인지 알 수가 없다. 갑자기 시력에 이상이 생겼나!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리다가 다시 시계를 본다. 보이긴 하는 데 이번에 원형 벽시계가 손목시계만큼 작아 보인다.
뒤를 돌아보니 벽에 붙여놓은 책꽂이에 꽂힌 책들이 멀리 보인다. 의자를 돌리면 필요한 책을 뽑아보던 그 거리가 아니다. 왜 이러지? 흐려지고 작아지고 멀어지고 … 이건 시력이 문제가 아니 것 같다. 문득 내 주위에서 나와 더불어 있던 모든 것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다가는 아예 실명(失明)하거나 내 몸이 점점 작아져 개미맘 해지지 않을까 불안하다.
책상 옆에 둔 안경을 찾아 끼고 방에서 나온다. 발코니를 향한 유리무니 보인다. 한결 눈이 밝아지는 느낌이다. 서랍이 여럿 달린 문갑위에 놓인 텔레비전이 보이고, 그 반대편에 벽 앞에 놓인 긴 의자가 보이고 그 의자와 문갑사이에 놓인 탁자가 보인다. 탁자 위에는 몇 권의 잡지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다.
긴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바로 오른 쪽에 놓인 텔레비전 리모컨이 손에 잡힌다. 아무 생각 없이 전원 단추를 누른다. 단번에 모니터가 밝아지더니 키 큰 피에로가 어린 아이들 앞에서 우스갯짓을 하면서 무어라 떠들고 있다. 배꼽을 움키고 웃는 아이 후딱 전원을 꺼버린다. 아이들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찬다. 그런데 이상하다. 떠들고 웃는 모습만 보일 뿐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볼륨을 높여 보아도 매 한 가지다. 이건 또 뭐지 … 후딱 전원을 꺼버린다. 거실에 적막이 내린다.
들밭이 깊숙이 몸을 부리고 앉아 있다. 귀 안에서 정적이 울기 시작 한다 처음에는 모기소리 만큼 하던 것이 차츰 커지더니 몸통 안에서 공명하는 건지 가슴 까지 울린다. 가슴 떨림의 고통은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다. 털어 버려야지 , 털어 버려야지…
앞쪽의자에 시선을 모은다. 검은 테를 두른 액자 안에 매화가 몸을 뒤틀고 서 있다. 구부러진 부분에 박힌 검은 옹이가 누에 거슬린다. 줄기에 비해 형편없이 나약한 가지에 피어 있는 하얀 꽃들이 조화(弔花)처럼 보인다. 저걸 왜 걸어 놓았을까. 한심하다. 눈을 감아 버린다.
눈을 감으니 이명(耳鳴)이 고개를 든다.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 밖을 본다. 거실과 발코니사이 유리창 미닫이에 다가가 밖을 내다본다. 앞 동 옥사위에서 양철 환풍기가 뱅뱅 돌고 있다. 가까이에 가면 윙윙 소리가 들일 것이다. 그래. 살아 있는 것은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것이지, 환풍기에 시선을 붙들린 채 유리창 미닫이를 연다. 혹시 발코니에 나가면 소리가 들릴 런지는 몰라,
발코니에 나가 선다. 발코니 바깥을 가로막은 유리창이 또 앞을 가로 막는다. 윙윙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순간 유리창을 밀쳐버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러나 발바닥이 간질간질 하다, 기껏 용기를 내어 유리창을 연다. 제법 거센 바람이 쏴 달려들어 얼굴을 끼친다. 눈을 감고 바람을 맞는다.
정신이 맑아진다. 바람은 움직이지, 눈을 뜨고 바깥을 본다. 앞 동 왼쪽 편 공원에서 가지를 흔들고 있는 나무들이 활기차다. 나무를 흔드는 바라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비어 있는 가슴에서 쉬쉬 소리를 내면 바람이 빠져 나감을 느낀다. 막혔던 가슴이 트인 건지 얼굴에 부딪는 바람 소리가 들린다. 바람에 나풀대는 나뭇가지 잎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