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로 레드

by 찬비

홀로 기숙사 건물을 몇 바퀴를 돌다 텅 빈 벤치에 앉았다. 눈으로 건물의 옥상 높이를 재다 보니 옥상에서 떨어지고 싶은 충동이 들어 급히 시선을 돌렸다.


원이 다가와 "또 고독한척 하고 있네."라며 말보로 레드 하나를 건넨다. 담배 피지 않는 내 손에 담배를 쥐어주며 원은 이런 건 친구한테 배우는 거라고 말했다.


얼떨결에 받아든 담배를 대충 입에 무니 원이 라이터 불을 가져다 댔다. 불이 붙지 않아 어리둥절해하자 원은 빨아들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 힘껏 빨아들이다 케켁 기침을 토해냈다. 원은 낄낄거리며 오동통한 다리를 접어 다른 쪽 다리에 걸친 채 흰 연기를 길게 뿜었다.


목을 태우는 듯한 담배 연기에 괴로움을 느끼며 원을 바라봤다. 원은 매운 걸 참 잘도 태우고 있었다.

"막 빨아재끼지 말고, 조금 빨다가 천천히 뱉으라. 그럼 괜찮디."

원의 말대로 살짝 들이킨 후 천천히 숨쉬자 폐는 뜨거워지고, 뇌는 알딸딸해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내 몸이 망가지고 있는 느낌은 묘한 흥분감이 있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연기를 상상하며 다시 음미하듯 마시고 내뱉었다.


뭔 일 있냐며 저녁마다 혼자 돌아다니냐는 원의 질문에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진짜 그냥 산책하려던 거였는데 나조차도 왜 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감상에 젖은 중2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은 담배피는 남자 어떠냐고 물어봤고, 단번에 싫다고 대답했다. "지랄하고 있네. 이제 지도 피면서"라는 원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원은 놓치지 않고 "울다가 웃으면 똥꼬에 털난데이"라고 덧붙였다. 레게머리를 쓸며 담배를 마저 피우는 원을 보며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과 있으면 자유로운 그의 영혼처럼 나까지 구속에서 벗어난듯 했다.


원은 여자 좋아하는 양아치로 소문나있었다. 그래서 생면부지의 레게머리가 다가와 인사했을 때 진심으로 경멸했다. 길에서 레게머리가 보이면 굳이 다른 길로 갔을 정도로 인사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와 친해진 건 학교에 원의 부모님이 의사이고, 3층짜리 고급주택에 산다는 것이 소문났을 무렵이었다.


대학생인 원은 한 달 용돈으로 현금 100만 원과 신용카드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원은 그 돈으로 사람들에게 술을 자주 샀다. 술이나 얻어먹자라는 생각으로 몇번 술자리에 따라갔다가, 어느새 우린 막역지간이 되었다.


원과 나는 매우 달랐다. 원은 명품으로 휩싸인 힙합퍼 같았고 나는 단출한 모범생 같았다. 그럼에도 돈을 써서 사람들 속에 있는 원과 돈 때문에 사람을 만날 수 없는 나는 외롭다는 점에서 닮아있었다.


원의 집에서 3일을 지낸 적도 있었다. 기숙사 신청을 잘못해서 머물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은 3층의 원의 방에서 지냈고, 나는 2층의 게스트룸에서 지냈다. 둘 사이엔 정말 아무일도 없었다. 그러나 둘이 평소에 자주 어리다보니 우리가 연인이거나 파트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대학교 4년 동안 나의 남자친구는 여러번 바뀌었지만, 원은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친구였다. 어느 날 원이 "네가 연애를 계속하다가 30살이 넘었는데 혼자야. 그리고 나도 그때 혼자야. 그럼 우리 그때 결혼하자."라고 했다. 는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럴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원은 내 친구였으니까.


30살이 넘기 전 원과는 연락이 끊겼다. 처음엔 삶이 바빠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원이 나를 떠난 건지도 모르겠다. 원이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어. 근데 우린 친구야"라며 껄껄 웃었던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들으며 '맞아 우린 특별한 친구야'라고 생각했는데 나만의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말보로 레드를 보면 원이 떠오른다. 내가 힘들 때 위로해주고 홀연히 사라진 원. "고독한 척하고 있네"라며 내밀던 말보로 레드 한 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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