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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bin Park May 10. 2023

낯선 곳에서의 한 달

떠나온 거리만큼 깊어지는 시간들

금세 한 달이 흘렀다. 집을 떠나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낯선 곳에서 아침을 맞을 줄은 몰랐다. 떠나오기 전까지는. 정확히 10년 전, 배낭을 메고 낯선 땅을 밟아가며 누렸던 시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나는 왜 지금 여기에 표류하고 있는 걸까.


항상 동해를 동경해 왔었다. 바다를 품은 마을에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반드시 써두면 훗날 이룰 수 있을 거라는 나만의 버킷 리스트 안에는. 어찌 보면 작게 소망해 왔던 꿈들을 이루어 내기도 한 것인데 이상하게도 마냥 좋은 감정만 머물지는 않는다. 마음의 무게 혹은 역할의 부담이 큰 탓이었을까. 사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이 감정의 명확한 출처와 이유를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라는 사람은 어느덧 새로운 것들에 대한 감흥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더 냉소해졌고, 과하게 이성적인 사람이 되려 했다. 역설적이게도 내가 원하지 않던 모습을 내가 원하게 됐다. 내가 가진 성향을 일부러 바꾸려 했고, 다른 사람처럼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나를 잘 안다는 핑계로 나와 더 멀리했다. 


이 글은 제목처럼 떠나온 날들의 소회를 담고자 했다. 생각 없이 글을 막 써 내려갈 줄 알았다. 그런데 첫 줄을 채우기까지 꽤나 긴 정적이 흘렀다. 재생되고 있는 플레이리스트 트랙만 정박자에 갈 길을 잘 찾아가고 있었다. 두세 번 음악이 바뀌고나서부터야 줄을 옮길 수 있었다. 여전히 중간중간 멈춰서는 페이지 안에서의 보이지 않는 쉼표들이 수두룩하다. 그 여백은 나만 볼 수 있다. 



살면서 가장 이른 시간에 눈을 뜨고, 가장 자주 잠에서 깼다. 아침인지, 새벽인지, 오밤중인지, 대낮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습관처럼 나를 자책했다. 나에게서 문제를 찾았다. 그런데 그 문제의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는 위로를 건넸다. 나 자신에게. 화자만 있고 청자는 없는 대화같았다. 


차가 없으니 걷는 시간이 늘었다. 수평선 너머의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상상을 하며 매일의 파도를 멍하니 쳐다보기도 한 날들도 늘었다. 자연에게 늘 위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항상 자연은 묵묵히 그 자리에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언제 찾아가도 한결같이 나를 반겨줘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은 항상 자연에 도전한다. 그런데 항상 실패한다. 가깝게 보면 정복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들도 있었지만 그 끝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명백하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그래야 잘 살 수 있는 세상이니까. 고민한다고 어떻게 살 것인지 답을 찾을 수 있는 세상에 내가 살고 있는지 종종 자문한다. 그런 세상에 내가 살고 있었다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확답은 못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삶은 그렇지 못했다. 



배낚시를 하며 처음으로 출항의 설렘을 맛봤다. 내가 늘 서있던 곳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어찌해도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나는 온전히 나를 내던지곤 한다. 그게 배든, 비행기든, 버스든, 기차든, 자전거든, 걷든 말이다. 그렇게 내던져진 나는 비로소 여정을 즐길 수 있었다. 노트북과 스마트폰으로 권능을 누리던 한 인간의 대단한 하루에 대단한 불편함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어찌할 수 없는 나를 의도적으로 내던진다. 거친 파도를 보고 과감히 출항하는 낚시꾼처럼. 좋은 파도를 보고 과감히 몸을 던지는 서퍼들처럼. 


오늘도 바다는 수없이 일렁이며 자기만의 균형을 찾는다. 그리고 누군가의 균형을 돕는다. 그렇게 묵묵히, 매일, 똑같이, 지겹게 나아간다. 그래서 끝이 보이지 않는다.


/ 230510(수) 9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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