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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May 23. 2022

자격지심에 대하여

쉽게 초라해진다면 결국 마음의 문제일까.


나에게는 두 가지 자격지심이 있다. 전업주부와 가방끈, 이 두 가지 자격지심은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닌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끊임없이 초라해지는 기분을 느낀다. 아니, 그 기분은 느껴진다기보다 견뎌진다. 견뎌진 기분은 늘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초라해지고야 만다. 전업주부라는 직업으로 나는 가족들의 삶에 기여하고, 일정 부분 시간에 대한 자유를 얻는다. 그 자유는 가족들의 생활 패턴에서 남은 시간의 조각이다. 그 조각은 일정하지 않다. '자유'지만 그 자유는 '제한적 자유'다. 자유 앞에 붙은 '제한적'이라는 말은 자유를 더 이상 자유일 수 없게 만든다. 


전업주부인 나에게 글쓰기가 우선이 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왜일까. 글쓰기를 앞으로 내세우면 생길 수밖에 없는 부담감 때문이다. 그 부담감은 결국 돈이랑 연결된다. 글을 쓰면서 백 원짜리 동전 하나 벌지 못하는 내가 전업주부라는 직업 앞에 글쓰기를 앞세우기는 어렵다. 가끔은 좀 뻔뻔해지고 싶기도 하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다 보면 괜찮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싶어지는 것처럼, 당당하게 나 스스로를 작가라고 말하다 보면 정말 작가처럼 될 수 있지도 않겠는가. 역시 어렵다. 부담감을 회피하기 위해서 나는 여전히 나를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작가'라는 말이 거창한 의미가 아니라고 아무리 써도, 내 마음속에 '작가'라는 단어는 꽤 큰 의미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는 내가 쓰는 글보다 항상 더 나은 글을 원했다. 그래서일까. 대단하지 못한 느낌에 사로잡혀 누군가 인정해 주지 않으면 절대 작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못을 박아버렸다. 이제 그 못을 빼야겠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대단한 경력을 가지고, 쉽게 쓰지 못할 글을 쓴다 해도, 나는 나만의 글을 쓰면 된다.        

- 지금은 B급 잡문을 쓴다 - 브런치 발행 글


작년 여름쯤 쓴 글의 일부다. 나는 스스로 박은 못을 뺏다고 할 수 있을까? 이전보다 더 나은 글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만의 글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쓴 글은 언제나 내게 질문하고 있다. 대답하기 무안한 기분이 들어 얼마 전 읽었던 책의 일부를 적어본다.


무섭다. 내 책장에 꽂힌 내 책들을 보기가 무안해서 가끔 나는 책들을 뒤집어놓는다. 저 책들 속의 무수히 많은, 내 안에서 튀어나온 쓸데없는 말들을 다 어떻게 해명한다 말인가. 그날, 해명을 하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말을 동원해야 할까. 어떨 때는 글을 쓰는 것이 큰 벌인 것만 같다. 글쓰기를 통해(서만) 위안을 얻는 사람은 위안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데, 쓸데없는 말을 빼고 문장을 쓸 수 없다.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 62p. 소설가의 귓속말 / 이승우  -


쓰지 않고 견딜 수 없어 쓰게 된 문장임에도 다시 그 문장을 거두어들이고 싶어질 때가 있다. '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홍상수의 영화 제목처럼, 확고했던 생각도 시간이 흐르면 어딘가 모르게 달라져 있는 경우가 많다. '내 안에서 튀어나온 쓸데없는 말들을 다 어떻게 해명한다 말인가'라는 문장에서 작가의 현실적인 딜레마가 느껴진다. 생각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나온 책의 문장은 바꿀 수 없다. 내 생각은 달라졌는데 문장은 얼굴을 달리 할 수 없기에 그 상태 그대로 누군가에게 읽힌다. 난처한 상황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40년 동안 작가로 살아온 이승우 작가는 이 책에서 '글을 쓰는 것이 큰 벌인 것만 같다'라고 말했다. 문학상을 받기도 여러 번, 낸 책만 해도 여러 권인 작가가 자신의 책을 보기가 무안해서 뒤집어놓는 심정은 어떤 감정일까. 고작 브런치 작가로 1년 지내온 내가 그 말을 어렴풋이 이해한다고 말하면 좀 우스워 보일까. 작가의 생각이 물이라고 한다면, 일정 부분의 물은 어딘가에 고이고, 남은 물은 자연스럽게 제각각 흐른다. 고인 물은 대체로 거기에 있지만 새로운 생각이 더해져 다시 고이기도 한다. 어떤 식으로든 순환이 필요하다. 그저 고여있는 물은 썩는다. 작가라면 생각을 달리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로 인해 과거의 생각을 해명해야만 하는 일이 생긴다. 글을 통해 생각을 말하고, 그 생각은 누군가에게 전해지지만, 시간이 흘러 달라진 생각으로 인해 작가는 또 다른 글을 쓰게 된다. 자신이 과거에 쓴 글을 자기 자신이 해명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작가에게는 '큰 벌'로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방끈에 대한 자격지심은 좀 더 복잡하다. 내가 느끼는 가방끈이 짧다는 것에 대한 자격지심은 지식에 대한 미흡에서 비롯된다. 글을 쓰면서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배경지식에 대한 부족함으로 인해 나는 스스로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자주 묻는다. 부족하면 스스로 채워나가면 될 일이고, 부족하다 해도 내가 다른 이들보다 나은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번번이 나는 나를 코너로 몰아넣는다.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당연히'라는 모호한 말로 나는 나 스스로를 괴롭힌다.


이런 걸 모른다고? 상식이 없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시에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없다는 생각도 한다. 이 모순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도 하고, 나를 머뭇거리게 하기도 하고, 뒷걸음칠 치게 하기도 한다. 모순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에 적합한 형태의 단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대중음악이나 영화는 잘 모르지만 인디밴드 음악이나 영화는 남들보다 잘 안다. '남들'이라는 기준 또한 애매하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에 내가 같이 열광하는 것을 즐기지 않다는 점에서 기준을 나누어 보면 그렇다. 그렇다고 내가 유행을 전혀 따라가지 않느냐고 한다면 그렇지도 않다. 어떤 면에서는 악착같이 트렌드를 알려고 노력한다. 무엇이 요즘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지 끊임없이 찾고, 알고 있으려고 한다.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따라가지 않으려는 노력, 마음과 행동을 반대로 하는 모순은 습관처럼 반복된다. 어딘가에 휩쓸려가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는 동시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휩쓸리는 것에 대해 알기 위해 애쓴다고 하면 이 말은 적절한 해명이 될까.

다시 돌아와서, 가방끈에 대해 자격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된 건 오래되지 않았다.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주하지 않고 회피했기 때문에 정확히 인식하기가 어려웠을 뿐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책을 이전보다 많이 읽게 되었다. 그로 인해 책을 쓴 사람들의 이력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는데 고학력자인 경우가 많았다. 들어도 알 수 없는 분야를 전공한 사람들, 공부 외에 다른 것들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들은 내게 자극이 되는 동시에 자괴감이 들게 했다. 내가 살아온 시간이 텅 빈 상자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와 그들의 삶이 동일시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와 그들의 삶이 비슷해져야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그들의 그런 이력을 내심 동경했다. 그러면서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학력 통해 들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가고 싶은 대학의 학과 실기시험이 어려울 것 같다는 이유로 응시조차 하지 않은 것, 졸업 후 방송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어쩐지 기가 세 보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해보지도 않고 포기한 것,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것, 그런 것들이 결국 나의 가방끈과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가방끈이 도전도, 견딤도 짧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주어진 시간을 딴청 피우는데 다 쏟아부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방 짧은 전업주부는 초조해질 때마다 조심스레 노트북을 열어 글을 쓴다. 글을 쓰고, 또 고쳐 쓰고도, 시간이 지나면 쓴 글들에 대해 해명하는 글을 쓴다. '큰 벌'을 받고 있다고 하기에는 아직 쓴 글들이 많지 않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누구에게나 자격지심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어도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어떤 방면에서는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그런 인간으로 살아가며 나는 글을 쓰고자 한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자격지심에서 벗어난다. 어떤 사람보다 잘 쓸 수는 없다 해도, 어떤 사람처럼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모순적인 나는 이런 나를 쓴다. 쉽게 초라해진다 해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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