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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Aug 02. 2021

마음을 쓰는 소비의 순간

잡지를 읽지 않아도 삶은 계속되겠지만

마음에 드는 책이나 잡지를 발견하면 아껴서 읽는 버릇이 있다. 남아 있는 페이지를 확인하면서 읽는다. 이 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쉬워하며,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기분은 꽤 그럴싸하다. 책을 주제로 한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다독하기보다는 좋아하는 글을 천천히 씹어 소화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음식에 있어서도 그렇다. 다양한 음식을 맛보기보다는 맛있는 음식 한 가지를 천천히 즐기는 것이 더 좋다. 다만 맛있는 것이 있을 때는 늘 그것을 먼저 먹는다. 갓 만든 신선한 음식이 입안을 스칠 때, 나는 먹는 즐거움을 느낀다. 읽는 것은 좀 다르다. 글의 분위기를 타고 읽다 보면, 기다렸다는 듯이 내 마음을 흔드는 문장이 나타난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마음에 쏙 드는 음식점을 찾기 힘든 것처럼, 읽을거리도 그렇다. 수많은 책들 중에서 나와 꼭 맞는 책을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런 책을 만나는 순간에는 늘 남은 페이지를 의식하게 된다.


순식간에 다 읽기에는 어쩐지 아깝다.


최대한 천천히 책을 즐긴다. 때로는 더 읽고 싶은 욕구를 참고, 과감하게 책을 덮어버린다. 일부러 아쉬움과 기대감을 남겨두는 것이다. 이런 책을 만나는 날은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내고 싶다.


여러분, 제가 이런 책을 발견했어요! 드디어 만났어요!


최근 매거진 어라운드 78호가 그랬다. '소비하는 삶'을 주제로 한 기사들은 갓 손질한 재료처럼 신선했다. '일하는 방식을 실험하는 크리에이트 그룹'인 모빌스 그룹은 '스몰 워크, 빅머니(Small Work, Big Money)'를 외친다. 인터뷰 내용 중 지혜로운 소비에 관한 답변이 눈길을 끈다. 모빌스 그룹의 팀원인 유튜버 모춘은 기념으로서의 소비가 많은 편은 편인데 못 생겼더라도 기념할 만한 거라면 일단 사게 된다고 한다. 여행지이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금액으로 손해를 보기도 하지만 그 순간을 기념하고 싶어서 그냥 소비를 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따진다면 최저가는 소비에 큰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나 또한 여행지에 가면 기념한 만한 무엇을 꼭 사려고 하는 편이다. 그 물건은 여행의 순간을 담기에 충분한 존재감을 가진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그 가치는 더 커진다.


강화도에서 산 효자손을 동네 지하상가에서 만난다 하더라도, 그 두 효자손은 명확히 의미를 달리한다. 강화도에서 산 효자손은 그곳에서만 살 수 있는 기념품이다. 부모님께 사다 드리면 좋아하실까 고민하며 산 효자손은 애석하게도 가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손에 들린 효자손은 기다린다. 자신이 누구의 등을 긁어주게 될지 기대하면서 말이다. 부모님은 내가 건넨 효자손을 어색한 표정으로 받아 들고, 잘 되나 시험 삼아 효자손을 등에 쏙 넣는다. 때때로 그 효자손을 볼 때마다 나와 부모님은 그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강화도 효자손이 아직도 저기 있네. 우리 딸이 사 온 효자손이었지.


그날의 소비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생긴다. 부모님은 내 효자손을 지하상가에서 파는 새 효자손과 바꾸지 않을 것이다. 가치는 눈에 보이는 수치로만 매겨지지 않는다. 물론 최저가를 찾기 위한 소비도 계속된다. 같은 제품을 싸게 사는 것도 능력이다. 다만 모든 소비가 실용성이나 가성비로 평가될 필요는 없다. 소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눈에 보이는 물건뿐만이 아니다. 그것을 소비한 순간을 살 수 있기도 하고, 그것을 만든 사람의 정성을 천천히 헤아릴 수 있기도 하다. 소비는 그 사람의 취향을 더 또렷하게 만들어 준다. 비슷한 옷이나 제품을 계속 소비한다는 건 그런 스타일을 좋아한다는 증거다.

 


시인 유진목의 인터뷰도 주목할만하다. 그녀의 말들은 단단하고 매끈한 돌멩이처럼 느껴진다. 모난 거 같지만 실제로는 잘 다듬어진 작품처럼, 자신만의 빛나는 가치들이 그곳에 머문다. 2015년 등단한 그녀는 청탁을 받으면서 원고료를 안내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창작물에 재능기능기부를 요하는 사회에 그녀는 고료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낸다. 우리나라에서 창작물에 사용료를 지불하는데 인색한 이유를 묻자 '선배들 탓'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한 번 더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 돈보다 가치가 중요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돈을 버는 행위는 필요하다.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사람은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순간이 늘 멋쩍게 느껴진다. '돈'에 대한 적절한 요구를 잘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런 요구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썼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다. 면접을 보거나 연봉협상을 하게 되는 순간 내가 추구하는 가치의 우선순위가 '돈'으로 비치는 것을 은연중에 경계해왔음을 고백한다. 나를 먹고살게 해주는 '돈'을 외면하며, 나는 다른 가치가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고고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늘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그런 모순적인 태도는 결국 나와 이름 모를 누군가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정당한 요구를 하지 못했던 나로 인해, 누군가는 또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글을 쓰는 일을 청탁받는 일이 내게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다면 나는 정확히 물을 것이다.


고료와 지급일을 명시해주세요.


우리가 당신에게 청탁을 하는 것을 영광으로 아세요, 그런 태도를 취하는 곳에는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녀의 인터뷰를 통해 정확히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 잡지를 소비한 일 또한 참 가치 있게 느껴진다. 잡지를 읽지 않아도 삶은 계속되겠지만 잡지를 소비함으로써 나는 삶의 한 부분을 다시 재정비했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행동을 지속하지는 않으리라는 다짐은 시인 유진목의 인터뷰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소비가 가치를 만들었고, 새로운 길로 나를 안내했다.  




 



지난 6월, 좋아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한 소비'라는 제목으로 브런치에 글을 썼다. 행동반경이 좁은 내게 소비는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 요즘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하는 소비는 책과 실이다.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책과 서점을 좋아하기 때문에 소비한다. 실도 마찬가지다. 뜨개 할 때의 몰입감과 결과물이 좋아서 자꾸 사게 된다. 소비함으로써 다른 세계가 열린다. 아주 작은 것들을 자세히 보게 되고, 하지 못했던 것을 해내는 과정을 통해 시간을 견고히 보낸다.


한때 유행했던 욜로라는 말도 이제 시들해졌다. 현재를 즐기기 위한 소비를 조장하는 문화는 저마다에게 다른 의미로 남았을 것이다. 지나간 짜장면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던 나상실(드라마 환상의 커플 참고)의 말처럼, 지나간 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짜장면을 다 먹을 필요는 없다. 현재와 미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소비를 나는 지향한다. 미래에 나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의 소비, 현재의 나에게 가치 있는 소비를 하고자 한다. 무척 어려운 일이다.


소비가 단순히 의식주를 해결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가치 있는 소비를 고민하게 된다. 소비가 나의 생각이 되고, 추억이 되고, 취향이 된다면, 우리가 쓰는 순간들은 결국 가치 있는 순간으로 귀결된다. 이 얼마나 멋진 소비인가. 마음을 쓰고 싶은 순간들에, 소비하고 싶다. 다 읽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는 글의 조각들처럼.



참고 자료 : 어라운드 매거진 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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