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한 건 나 하나가 아니야
가끔 홍상수 영화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이 세상에 찌질한 인간이 나 하나가 아니라는 확인이 필요할 때 , 그의 영화는 위로가 아닌 진짜를 보여준다. 홍상수 감독을 좋아해서 보는 건 아니다. 그저 그의 영화가 필요한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왜 저렇게 대낮부터 술을 마셔?
왜 저렇게 하지 말라는 짓을 골라서 해?
그의 영화에서는 그런 인간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술판을 벌인다. 퇴근을 기다리는 직장인들처럼 배우들은 술 마시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해서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느껴지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예쁘다'라고 말하는 것도 최준(카페 사장)이 먼저가 아니다.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함춘수(정재영)가 윤희정(김민희)에게 대놓고 예쁘다고 하면서 얼마나 들이대는지, 정말이지 보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다. 함춘수가 말하는 '예쁘다'의 속내에는 '자고 싶다'가 분명히 들어 있다. 술 마시고 취해 '어떻게 한 번 해보고 싶다'는 기분과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감정에 솔직하지만 도덕적이지 않고, 숨기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말하고야 만다. 저 정도에서 멈춰야지 싶은데 항상 선을 넘는 말과 행동을 한다. 감정의 과잉인지, 감추지 않은 솔직함인지, 혼란스럽다. 그는 영화 속에서 농담 따먹기를 하며 우리에게 묻는다.
상큼하고 풋풋한 것과는 거리가 먼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늘 마음이 야리꾸리하다. 여자를 꼬시기 위해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 그들의 진심과는 상관없이 그 상황에 몰입하는 이들의 모습은 사실 낯설지 않다. 어떤 날의 술자리, 모임에서 흔히 생길 수 있는 일이다. 반갑지 않지만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그런 일들.
모두가 죽으면 무엇이 남을까. 나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넷플릭스에 올라온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라는 영화를 보며 캔맥주를 마셨다. 주인공들이 맛있겠다고 부러워한 컵라면까지 다 먹어치운 나는 이 지리멸렬한 영화를 끝까지 관람했다. 아무래도 나는 홍상수의 영화를 이해할 수 없다. 뭐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하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영화도 거의 비슷한 느낌이라 이걸 자신만의 색이라고 해야 할지 미세한 자기 복제라고 해야 할지 애매하다.
그의 카메라 시선은 너무 노골적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볼 때 갑자기 자세히 관찰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마치 그런 느낌으로 카메라가 등장인물을 의도적으로 클로즈업할 때가 많다. 노골적인 시선과 언행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든다. 현실에서도 그런 사람은 꽤 많다. 한 마디로 그의 영화는 노골적이고, 불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문을 모른 채 가끔 홍상수 영화를 본다. 그의 사생활과 관계없이 그의 영화가 필요해질 때가 있다. 홍상수의 눈을 통해 보는 세상은 필터가 없다.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으로 인물들을 포장하지 않는다. 자신의 명예를 이용해서 수작을 부리고, 그 수작에 넘어가 사랑 타령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남다를 것 없는 인간의 밑바닥과 본심을 엿본다. 술이 깨면 현실로 돌아와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인물들처럼,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제각각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 삶이 어디로 향해 가는지 우리는 촉을 세울 필요가 있다.
남에게 상처를 주어도 내가 행복하면 그만인 자들에게, 결국 상대가 아닌 나의 상처가 더 걱정되어 발걸음을 멈추는 자들에게, 홍상수의 영화를 추천한다. 그의 영화는 아름답지 않다. 인생도, 사랑도, 삶도 아름답지 만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삶은 아름답지 않은 가운데 빛난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다. 그가 자신의 영화를 통해 자신의 사생활을 정당화하려는 대사를 지껄인다 해도 나는 안다. 그것이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알려 준 것은 다름 아닌 홍상수,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