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만한 낮달이 떠 있었다. 동쪽하늘에 뜬 낮달은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지나쳐버릴 만큼 희미하다. 있는 듯 없는 듯 희뿌옇게 뜬 낮달이라니. 벚나무 아래 앉아있던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수염을 쓰다듬고 무언가를 노려보더니 느린 걸음으로 그늘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하얀 티끌이 바람결에 떠올라 이리저리 흩날리는 것이 전부다. 나는 이런 고요를 오랫동안 그리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문이 열리며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여자는 종소리가 멈출 때까지 문 앞에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내 앞으로 와서 앉았다. 그녀는 물이나 커피를 마실 수 있는지 물었다. 늘 그렇듯 손님들은 잠시 가게를 둘러본다. 그리고는 '책이 많네요.' 라거나, '생각보다 멀더라고요.' 라는 말을 하며 어색함을 지운다. 그러다 창밖으로 눈길을 돌린 후 어떤 고요를 발견하게 되면 비로소 말문을 열고 하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됐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여자는 이 문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 탓인지 무심히 말했다. 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그 흔한 일. 그런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인생을 모조리 흔드는 사건이 될 때도 있다. 여자는 푸석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꾸미지 않은 모습이라 대학원생처럼 보였지만, 얼굴의 잔주름이 나이를 가려주지는 못했다.
“이런 걸 이해해줄 사람이 있을까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이야기라 여길 왔어요. 그 사람이요? 네, 직장일과 관련해서 알게 됐어요. 글쎄요. 이제 사개월 정도 되었네요. 여긴 참 조용하고 좋네요. 어떻게 이런 곳에 타로카페를 차리셨을까요. 저도 여기서 책이나 읽으며 지내고 싶어요.”
여자는 고개를 돌려 책꽂이에 꽂힌 책을 봤다. 그녀는 거친 풍파를 겪은 건 아니지만 본연의 부드러움을 잃을 만큼의 어려움은 겪은 사람처럼 보였다. 자주 한숨을 쉬었고, 자주 놀란 듯 눈을 떴다.
“선생님 혹시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소설 읽어보셨나요? 아, 영화를 보셨군요. 그럼 그 여자와 남자에 대해 잘 알고 계시겠어요.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여자는 36세였고 남자는 15세 소년이었죠. 그런 사이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이 많은 여자와 젊은 남자요.”
여자는 동의를 구하듯 나를 바라봤다. 그녀가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지 비로소 짐작이 갔다.
“생각도 못한 일이예요. 그냥 그 꼬마가 커피를 뽑아다 주고, 친절하게 뭔가를 설명해줄 때만 해도 말이에요. 조카뻘이라 귀엽게만 생각했어요. 제가 올해 쉰 살이에요. 그 꼬마는 스물일곱이고요.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그런데 우리끼리 있을 땐 말이 잘 통해요. 부끄럽게도 그 꼬마가 올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어요. 나를 보고 웃으면 가슴이 설레기에, 미쳤구나 싶었어요.”
그녀는 이 말을 하면서 민망한 듯 오른쪽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한편으론 이제야 털어놓을 수 있어 편해진 것도 같았다. 드러낼 수 없는 사랑이라 해도 누구에게나 다가왔던 그 감정을 말하고 싶어 했다.
“책 읽어 주기, 샤워하기, 사랑나누기 그리고 나란히 누워있기.
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그리고 그녀와 이야기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다.
<책 읽어주는 남자>에 나오는 저 구절을 여러 번 생각했어요.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인데 꼬마를 만나고 나서 다시 읽었어요. 책에 나오는 장면이 우리의 어느 날처럼 익숙했어요. 둘 다 책을 좋아하거든요. 꼬마가 내게 시집을 건네주던 날, 우리 사이에 가늘게 연결된 것이 무언지 알게 되었어요.”
그녀는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고양이가 돌아와 동그랗게 몸을 말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하얀 털 위로 떨어진 햇살이 따가운지 이따금 몸을 꿈틀거렸다.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6월의 오후. 소설 속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천천히 이어갔다. 나른하고 고요한 풍경이 모든 것을 잠재울 것만 같다. 그리고 그녀가 뽑은 카드는 여섯 개의 컵이 그려진 카드였다.
여섯 개의 컵에는 모두 꽃이 담겨있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이 어린 소녀에게 꽃이 담긴 컵 하나를 내밀고 있다. 그들은 소박한 마을 광장에 서 있고, 뒤쪽으로 벽돌집과 돌길이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행복하고 단순한 그림이다. 선물을 주거나 사랑을 전하는 모습이라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전면에 나온 두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처음과는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린 소녀로 보였던 여자의 얼굴이 나이든 여인이란 걸 알게 된다. 머리를 두른 스카프가 반쯤 흘러내렸다. 꽃이 만발한 따뜻한 날인데도 여자는 두꺼운 옷을 껴입고 큰 장갑을 끼고 있다. 여인은 남모르는 사연을 안고 살아왔을까. 소녀 같은 작은 몸집은 그녀의 어린 시절이었을까.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늘 추운사람처럼 보일까. 그래서인지 여인이 꽃을 받아드는 모습이 어딘지 애처롭다.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여인에게 꽃을 건네는 사람은 소년처럼 보인다. 그는 머리 전체를 덮은 모자를 쓰고 있어서 옆모습만 겨우 보일 뿐이다.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꽃이 담긴 컵을 여인 앞으로 건네고 있다. 왜 젊은 소년이 여인에게 꽃을 건네고 있을까.
이 카드는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과 현재의 시간이 공존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내게 살아온 시간을 축복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슬퍼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데 어느새 가슴이 아파오는 그림이다. 이 동화 같은 그림 속에는 숨겨진 비애가 있다.
그녀는 문학소녀였거나 작가를 꿈꿨을지 모르겠다.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섬세하고 여린 사람이구나. 테이블에 떨어진 티끌을 집어내며, 남편과 떨어져 산지 2년이 되었는데 자신은 오래전부터 남편을 떠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남편이 무서워요. 표면적인 핑계는 직장문제였지만 그녀는 주말부부가 되면서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남편에게 말해버릴까 하는 생각이요.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라고 한다면 남편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까요. 아마 날 죽일지 몰라요. 남편이 실제로 내 목을 조른 적도 있었으니까요. 아득하게 의식이 흐려지는 공포 속에서도 이대로 죽여줬으면 싶었어요.”
그녀는 무슨 이유인지 자기의 감각 하나를 잘라버린 사람처럼 말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감각 하나를.
“꼬마를 만나서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길 나누다 보면 지금의 나를 잊게 돼요. 진창 같은 시간들이 내겐 없었던 것처럼 말이에요. 꼬마와 같은 나이였던 때의 나, 결혼을 하지 않고 세상을 모르던 그 때의 나로 돌아가요. 그 아이의 얼굴에서 나의 청춘을 감싸 쥐게 되어요.”
그림 속의 소년은 자신이 여인에게 어떤 꽃을 건네는지 모를 수도 있다. 여인의 눈빛 속에 담긴 슬픔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저 누군가의 심부름으로 꽃을 전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인은 거의 우러러보듯 소년을 올려다본다. 자애롭지만 어딘지 슬픈 미소. 여인은 꽃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소년의 얼굴에 눈길이 머물러 있다. 그러니 이 카드는 여인을 위해 주어진 상황이다. 여인이 걸어온 보이지 않는 길과 보이지 않는 시간이 그녀의 얼굴에 담겨있다. 어떻게 될까. 꽃을 받아든 여인은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 저기 뒤쪽으로 한 남자가 긴 지팡이를 짚고 돌길을 걸어 올라가는 게 보인다. 꽃을 건네준 뒤 소년은 저 길을 따라 올라갈 것이다. 그럼 여인은? 꽃을 품에 안고 한동안 소년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겠지.
“꼬마를 언제까지 만날까요? 그리 오래 만나지는 못하겠죠. 결혼을 할 것이고 아이를 낳겠죠. 나와 같은 진창 속으로 떨어지진 말아야죠.”
여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늘은 어느새 구름으로 뒤덮이고 해마저 가렸다. 여자는 어느 한 곳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한참만에야 희뿌옇게 뜬 낮달을 발견했다.
“낮달이네요. 하늘에 핀 하얀 꽃 같아요. 어쩌면 그 아이와 저와의 관계도 낮달을 닮았어요. 있지만 또 없는 것 같은. 빛을 내지 못하고 창백하게 있다가 곧 사라질 것 같은 낮달이요.”
여자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신의 인생 전체를 되짚어 왔을지 모른다. 자신에게 다가온 이 시간이 인생의 마지막에 핀 하얀 꽃 일거라 생각하는 걸까. 남편에게 이혼하자는 말을 꺼낼 용기조차 내지 못하는 그녀는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 자신의 품에 남겨진 하얀 꽃을 보면 내내 무슨 생각이 들까.
“때때로 꼬마와의 마지막을 상상해 봐요.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다시 <책 읽어주는 남자>가 생각나요. 한나가 홀연히 떠나고 미카엘은 성장하여 법대생이 되잖아요. 그리고 둘은 법정에서 다시 만나는데 한나의 숨은 비밀을 알게 되고요. 여자는 문맹이었다는 것, 그래서 미카엘이 책 읽어주는 걸 그렇게 좋아했다는 것을요.
그렇죠. 선생님도 다 아는 이야기죠. 여자는 나를 사랑했을까, 남자는 오랫동안 궁금했는데 나중에서야 자기 고등학교 졸업사진을 여자가 간직하고 있는 걸 알게 되죠. 아마 나도 그럴 것 같아요. 그 아이의 작은 흔적을 내내 간직하고 살 것 같아요. 정말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이란 걸 알아요. 그런데 선생님,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어리석고 부끄러우면 안 되는 건가요?”
꽤 긴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먼 곳에서 왔다며 이젠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 했다. 아주 먼 곳에 자신의 이야기를 뱉어놓고 가려는 사람. 그 이야기가 자기 옆에서 자라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감당할 수 없어서, 이야기만 저 스스로 자라나게 먼 곳에 심고 가는 여자. 그녀는 올 때처럼 딸랑거리는 종소리를 남기며 걸어 나갔다.
나는 책꽂이 꽂혀있던 소설을 꺼냈다. 미카엘이 처음 한나를 찾아갈 때 꽃을 들고 갔다. 소년은 무릎을 살짝 굽히고 하얀 꽃을 여자에게 건네준다. 어떤 사랑과 어떤 꽃은 낮달처럼 하얗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