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생 21

by 열매

# 그와 그녀의 초상



스타킹을 신다가 눈물이 난 건 보험회사에 취직한 지 일 년 반이 될 무렵이었다. 나의 아침이 매일 이렇게 시작될 거라 생각하니 절망스러웠다. 나는 겨우 스물한 살이고 그건 인생을 결정하기엔 해 보지 않은 것이 너무 많은 나이였다.

출근하자마자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뒤 사무실 청소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창구에 앉아 보험금을 수령하러 온 고객을 응대하는 게 내가 하는 일이었다. 총무과 제일 뒤쪽에 지점장실이 있어서 손님이 오면 여직원들이 커피를 타 가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양복을 입은 남자직원과 유니폼을 입은 여자직원들로 식당은 북쩍였다. 달콤한 한 시간을 보내고 소화되지 않은 배를 끌어 앉고 다시 창구에 앉았다. 그러다 퇴근을 했고, 월말에는 야근을 했다. 간혹 회식이 있는 날이면 나이 든 과장이나 부장과 부루스를 췄다. 그땐 여직원들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걸로 알았다. 그렇게 계절이 쉽게 쉽게 흘러갔다.

스타킹을 신다가 눈물이 났던 날, 나는 온종일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떤 결단이 필요했다. 이런 인생 말고 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지금보다 더 흥미롭고 더 위태롭고 더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길 바랐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느 날 아침, 나는 과장에게 사직서를 냈다. 머리가 벗어진 과장은 “아니 왜?”라고 물으며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리와 부장이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라고 설득했지만, 그럴수록 나는 하루빨리 그곳을 떠나고 싶을 뿐이었다. “네 마음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좋은 회사를 그만둔다니 아깝긴 하다.” 엄마는 자개농 사는 것을 더 미뤄야 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왜 사진을 선택했을까?

순간에서 영원을 찾고 싶어서.

손발이 오그라드는 말이지만 당시에는 그보다 더 훌륭한 이유가 없었다. 그것이 스스로 내린 답이었다. 삶이 스타킹을 신는 것처럼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의미로 가득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은정아, 나 사진학과에 가야겠어.”

“사진학과? 갑자기 왜?”

“순간에서 영원을 찾고 싶어서.”

“뭐?”

“넌 찾고 싶은 게 있구나. 부럽네.”

문예부 친구인 은정은 할 말을 잃고 한동안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땀이 많아 겨울에도 손바닥이 축축했던 은정은 유니폼 치마에 손바닥을 쓱 문질렀다. 증권회사에 근무하는 은정은 아직도 시를 쓸까? 동생이 줄줄이 넷이나 있는 은정은 나처럼 사직서를 휙 던질 수는 없을 것이다.

“내 친구가 사진학과에 다니고 있어. 걔한테 연락해 둘 테니 정보를 좀 얻어봐.”

나는 모아둔 돈을 찾아 캐논 FM2 카메라를 사고 사진학원에 등록함으로써 좀 더 흥미로운 삶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소한 일상 아래 감추어져 있던 모든 혼란과 방황과 불안이 나의 세계로 들어섰다. 마치 검은 상자를 열어버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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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의 길로 접어든 건 나만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작은 오빠는 긴 머리를 묶고 방에 틀어박혀 기타만 딩딩 쳐대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가 기타를 쳤는지 모르겠다. 공고를 졸업한 뒤 취업 대신 대학에 가겠다고 호기롭게 선언했지만 매년 시험에 떨어지더니 삼수 끝에야 전문대에 입학했고 그마저도 잘 적응하지 못하는 듯했다. 학교를 가는 건지 마는 건지 몰랐다. 하지만 그때는 모든 게 다 허용되는 것 같았다. 젊다는 건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우리 앞에 놓여있으니 아무리 빙빙 돌아가도 시간은 겨울의 어둠처럼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작은 오빠의 많은 부분이 비밀에 감추어져 있었다. 음악을 한다며 밴드를 만들고, 낮과 밤이 바뀌고, 깊은 숲 속을 돌아다닌 사람처럼 지쳐 보이고. 오랫동안 사귄 애인은 없었던 것 같다. 매번 다른 여자와 다니는 걸 보긴 했다. 처음 오빠가 기타 연습을 하며 음반을 사 모을 때 만해도 가족들은 오랫동안 음악을 할 거로 생각지 않았다. 급기야 학교도 그만두고 연습실에만 나가는 오빠를 보며 아버지는 불안함과 노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야 어디 밥벌이나 하겠냐고 호통치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허랑방탕하게 보낸 젊은 시절이 자신을 어느 위치에 가져다 놓았는지 온몸으로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음악이냐고.


그러나 큰오빠와 나는 달랐다. 악보를 그리고 코드를 따는 오빠를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봤다. 음표들은 암호처럼 매혹적이었다. 그 암호들을 들여다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읽어내는 오빠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기까지 했다. 내가 들어갈 수 없는 세계에 그는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 같았다. 지미 핸드릭스나 제프 벡 같은 전설적인 기타리스트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오빠는 멋진 무대에 오를 거라고 믿었었다. 그랬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결국 그는 대학축제나 시골유원지 무대에 몇 번 오른 것이 경력의 전부였다.

불가해한 인간. 작은 오빠에게는 그런 영역이 있었다. 그 시절이었던가. 그는 철학적이라 할 만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간혹 그 말이 정신을 산뜻하게 할 만큼 신선했지만 계속 따라가다 보면 엉뚱한 궤변으로 빠져버려 결국 나를 놀라게 한 산뜻함은 어정쩡함으로 남아버렸다. 나는 그 모든 것이 예술가적 아우라라 생각했다. 음울하지만 특별한 존재. 그것이 조현병의 징조와 겹쳐진다는 건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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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기억난다.

그날, 작은 오빠와 함께 있던 여자는 키가 크고 세련된 외모였다. 나는 그녀를 세 번 보았는데 기타 학원에서 한 번, 카페에서 한 번, 그리고 오빠의 방에서 한 번. 마지막은 정확히 말한다면 오빠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즈음 오빠는 허름한 기타 학원에서 강사를 했다. 나는 심심할 때면 그곳에서 오빠가 기타 치는 걸 구경했었다. 오빠는 내게 드럼을 가르쳐 주기도 했는데 팔이 아파서 두 번은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날 저녁에 그녀가 있었다. 커트 머리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은 미인이라기보다 잘 생겼다는 느낌이었다. 오빠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서른쯤 되었을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

그녀는 창가에 서서 밖을 보다가 돌아섰다. 그날은 저녁 무렵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나서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그녀의 왼쪽 볼에 길게 칼자국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앞머리를 늘어뜨려 볼을 가리려 했지만, 흉터는 매우 선명해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거의 6센티는 되었다.

“사진 공부한다고? 남매가 모두 예술가시구나.”

그녀의 큰 눈과 시원스러운 입매는 볼의 흉터로 인해 비틀거렸다. 얼굴 전체가 여전히 날카로운 칼의 위협을 받는 것처럼 균형을 잃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더 많이 미소 지었다. 내심 흉터에 대한 궁금증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음에도, 아무것도 보지 않은 척했다. 그러나 눈길은 자꾸만 흉터로 되돌아갔다. 어쩌다 그랬는지 물어보기에는 흉터의 위치가 너무 위험했다. 팔이나 배도 아니고 여자의 얼굴이 아닌가.


얼굴의 흉터를 뺀다면 그녀는 거의 흠잡을 데 없는 여자였다. 아름다운 몸매, 정감 있는 어투, 정돈된 태도. 그래서인지 더더욱 칼자국은 형벌처럼 보였다. 누가 그랬을까. 단지 사고였을까. 교통사고가 아니면 어디에 부딪혔거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칼자국의 위치가 의도적이었다. 우리는 피자를 먹었는데 그녀가 입을 우물거릴 때마다 흉터가 움직였다. 나는 신체 위에 그어진 길쭉한 형태 하나가 그토록 강한 힘을 발휘할 줄 몰랐다. 그녀의 몸이 가진 아름다움은 6센티미터의 흉터 하나로 인해 처참해져 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던 뒷모습을 찍었다. 훗날 그녀를 다시 만나 프린트한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내가 이렇군요.”라고 했다. 나는 차마 그녀의 얼굴을 찍을 수가 없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만나지 않았기에 나도 그녀를 볼 수 없었다.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것은 결국 오빠 때문이다. 오빠가 죽은 뒤, 그와 함께 떠오르는 풍경이나 인물은 모두 오빠를 대신하거나, 보충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니 기억 속 장면은 사실이라기보다 그에 대한 은유나 상징으로 변화했다.

어느 날 오빠의 정신이 무너졌을 때, 얼굴에 칼자국이 난 그녀가 오빠 옆에 떠오른 것은 두 사람이 가진 같은 성질 때문이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상처를 드러난 채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오빠는 한눈에 봐도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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