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생 22

by 열매

# 또 하나의 눈


내게는 또 하나의 눈이 생겼고 그로 인해 세상을 달리 보게 되었다. 평범한 모든 것들. 쇼윈도 속의 마네킹이나 낡은 창문, 아이와 노인의 얼굴, 버스 창문에 내리치는 빗줄기.

카메라에 잡힌 것들은 불현듯 새로운 존재감으로 튀어 올라 나를 놀라게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교감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었다. 그랬다. 알 수 없는 끌림은 사람 사이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수표를 발행하고, 숫자를 합산하는 것보다 카메라를 들고 사물과 사람을 찍는 것이 훨씬 흥미로운 일이란 걸 사진 수업을 듣자마자 알게 되었다. 카메라의 작은 파인더를 통해 세상을 탐색하다 찰칵, 셔터를 누르는 순간 대상과 나는 전에 없던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마법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이 순간이 비로소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어두운 방에서다. 붉은색 조명이 켜진 암실에서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지를 약품에 담가 천천히 흔들면 숨어있던 이미지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쇼윈도 속의 마네킹은 이제 흑백의 모습으로 서 있다. 감정 없는 눈은 더 강렬해지고 어색하게 뻗은 손은 사각 프레임에 갇혀 버렸다. 쇼윈도 보다 더 협소해진 프레임이다. 영원히 그 속에 갇힌 마네킹은 더 이상 거리에 있던 그 마네킹이 아니다. 현실에서 건져 올린 이미지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담고 불멸의 시간 속에 봉인되어 버린 것만 같다.

시큼한 산성 냄새가 나는 암실에서 나는 연금술사처럼 불멸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며 묘한 흥분에 휩싸였다. 마치 고대의 동굴처럼 어둠만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거리의 이미지들은 하나의 의미로 탄생할 때까지 희미함과 뚜렷함을 반복했다.

1990년대는 사진이 우리나라에서 현대 예술의 한 분야로 자리 잡기 시작하던 때였다. 미국이나 프랑스, 독일에서 유학한 교수들이 감각적인 사진을 선보이며 인상적인 수업을 하던 시기였다. 때마침 서태지와 아이들이 세상을 뒤집을만한 노래를 불렀고 그 덕에 우리는 X세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민주화를 위한 학생운동도 자취를 감추었으니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과제는 유일무이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뿐이었다. X값을 찾아 방황을 시작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수많은 X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 학교는 지방에 있는 이름 없는 대학이지만, 사진학과만큼은 인지도가 있었다. 그 당시 사진학과가 있는 4년제 대학은 전국에 세 곳뿐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 학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학생의 반 정도는 서울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중앙대학이나 서울예전에서 떨어진 친구들이 몰려왔다. 우리 중 누구도 증명사진이나 여권 사진을 찍는 사진관을 차리기 위해 사진학과에 오진 않았다. 우리는 한마디로 예술가라는 덜 익은 정체성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특권을 거머쥔 것만 같았다. 뭘 해도 괜찮다는, 다소 미친 척 살아도 좋다는. 손쉬운 특권이었다.

1학년을 마치고, 시내에 있던 캠퍼스가 시골로 이전하면서 멀어진 등하교를 감당할 수 없어 자취를 시작했다. 나의 인생이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해방감이 든 것은 이때부터였다. 나는 지긋지긋한 집을 떠났다. 그와 동시에 가족들은 희미해지고 사진과 친구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그들은 개성과 우울을 모두 갖춘 젊은이들이었고 그중 반은 앞선 문화를 물어다 나르는 서울 사람들이었다.

우리 과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부류가 교차했는데 우선 서울 출신과 지방 출신이 반반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부유한 집안 출신과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갈라졌다. 서울 출신이지만 가난한 친구도 있고, 지방 출신이지만 부잣집 아들도 있었다. 어떤 선배는 돈이 없어서 시골에 버려진 폐가에서 한동안 지내기도 했다. 또 다른 친구는 자가용을 몰고 다니며 값비싼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그러나 그런 차이가 큰 영향을 주는 것 같진 않았다. 모두 젊음이라는 불확실성과 달콤한 방황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헤쳐나간다는 공통의 감정에 충실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다소 친한 무리가 하나, 둘 생겨났는데 와촌에 모인 우리 넷은 교차하는 부류 중 서울과 지방 출신의 가난한 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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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가 되면 문방구는 밀물처럼 밀려드는 아이들로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할머니 공책 어딨 어요? 실내화 주세요. 에이, 이거 말고요. 야, 저리 비켜. 100원이 모자라요.

초등학교에서 멀지 않은 문방구는 대로변에 있었다. 문방구 뒤에는 작은 방이 딸려 있었는데 그 방에서 나는 살았다. 노부부는 큰 개를 키우며 소소하게 농사를 지었다. 할머니는 점심시간이 되면 셔터문을 드르륵 올리고 몇 시간 가게를 지키다 아이들이 모두 떠나면 셔터문을 드르륵 내렸다. 문방구 쪽으로 난 미닫이문에 시티로 폼을 몇 장 대어도 모든 소리가 가감 없이 내 방으로 새어 들어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모두 작고 깡말랐는데 자주 다퉜다. 이제 할아버지는 소리칠 기운도 없는지 자주 기침을 컥컥했다.

방문을 열면 넓은 과수원이 보였다. 안개 낀 날은 굽은 나무들이 신비로웠고 비가 오는 날은 풀내음이 유난스러웠다. 여름에는 개구리 우는 소리로 사방이 요란했다. 그래서일까. 동네 이름은 와촌이었다.

정애 언니는 문방구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방이 딸린 점포 세 곳 중 첫 번째 방에 살았다. 철우 오빠는 그중 세 번째 방에 살았다. 그리고 현태 오빠는 길 건너 밭 가운데 있는 방에 살았다. 우리는 밤마다 개구리 우는 소리를 함께 들었다. 어쩌다 이곳까지 온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정애 언니는 늦은 나이에 사진학과에 입학했는데 묵호가 고향이라고 했고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이라고 했다. 나중에서야 언니의 인생을 그리 표현해도 될 만하다 싶었다. 언니는 자주 점심을 살뿐 아니라 하루키의 소설책을 빌려주기도 했다. 술을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술집에서 일한 경력이 화려했다. “한때는 내가 잘 나갔다고.” 언니는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나는 언니의 그런 솔직함이 좋았다. 방학이 되면 정해 언니는 친구가 하는 술집에서 일했는데 그 술집에는 예술하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언니는 장사를 하는지 그들과 노는지 알 수 없는 태도를 보였는데 그래서인지 자신이 술에 취하는 날이 더 많았다. 언니는 늘 커다랗게 음악을 틀어놓고 방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김광석과 정태춘의 노래가 자주 흘러나왔다. 혹은 빌 에반스의 곡도.

복학생인 철우 오빠는 키가 크고 순한 얼굴이었다. 입술은 유난히 두툼한데도 머리숱은 적어서 파마를 했는데 꽤나 잘 어울렸다. 다방면에 재주가 많았던 그는 기타도 잘 쳤고 글도 잘 썼다. 뿐만, 아니라 누가 봐도 성실한 인상이어서 어떤 부탁이라도 잘 들어줄 것 같은 선배였다. 문경이 고향이라는 선배는 방학이면 부모님을 도와 담배 농사를 지었다.

철우 오빠와 동갑인 현태 오빠는 서울에서 내려왔다. 배우 최민수가 많이 순해진 모습이라고 할까. 철우 오빠는 최민수보다는 좀 더 순화된 반항기를 보였지만, 그만큼 스타일리시했다. 그는 현학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하고 모든 걸 쿨하게 넘겨버리는 걸 즐겼다. 나는 그런 철우 오빠를 내심 불편해했지만 네 명이서 어울리는 때가 많았기 때문에 내 본심이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우리는 늘 정애 언니 방에서 모였다. 언니의 방은 모두에게 개방되었고 언니는 사람들을 그리워했다. 삼겹살이나 두부김치를 앞에 놓고 개구리가 우는 소리를 들으며 술을 마셨다. 누구는 뜨겁게 말했고 누구는 담배를 피웠고 누구는 화장실을 갔다 오며 하늘을 향해 냅따 소리를 질렀다. 그들 가운데서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느 날은 정해 언니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기필코 너를 잔뜩 취하게 해서 무슨 말이든 들어야겠다.”

나는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겨우 몇 마디 꺼냈을 때 누군가 “그건 말도 안 되지.”라고 한다면 순간 움츠러들어 입을 다물어버리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정해 언니는 나를 좋아하면서도 답답하다는 얼굴로 바라볼 때가 많았다.

“자, 마셔.”
결국 그들은 나의 숨겨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조차 생소한 나의 모습이었다. 술에 취한 나는 당황스럽게도 대성통곡을 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급기야 정애 언니는 나를 수돗가로 끌고 가 머리에서부터 물을 부어버렸다. 그제야 울음이 멈추고 나는 잠이 들어버렸다.

사진이 현대 예술의 한 분야를 차지하면서 사진학과 학생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예술가 지망생쯤으로 정했다. 하지만 이것이 다소 위태로운 것이란 건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자신을 표현한다는 건 에둘러 간다고 해도 자신의 무의식을 건드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좀 더 수준 높은 예술, 그러니까 자기를 넘어서는 시선을 갖추기까지 우리는 자신이라는 늪 속에서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그 속에는 비로소 드러나야 할 상처와 분노와 억압이 도사리는 어두운 골짜기가 있기 마련이다. 아마 나의 울음은 그것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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