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르크 & 시뮬라시옹

책 I 미리엄 메켈 'AI 시대, 우리의 질문'

by 청귤

AI 관련 책을 읽으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개별적 사건 보단 사건들 간의 맥락에 관심이 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패턴이고 얼마든지 알고리즘화 될 수 있다는것. 앞으로 AGI가 다양한 인간군상을 모방하고 생성할걸 생각하면, 내가 (또는 개별 인간이) 어떤 특정한거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 같은건 이제 점점 덜 중요해질지도 모른다. 300년전 데카르트가 신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의지를 쟁취한 이후로 우리의 이성이 최고야라는 착각에 살아온걸까. 칸트는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적이고 직관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했지만, 챗GPT는 감각 경험없이 (적어도 현재까지는) 단어 조합 확률예측만으로도 인간의 독창성을 위협하고 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개념을 공유하고 이데올로기를 만들며 국가라는 상상 집단을 구현할 수 있었다. 그런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신화가 과장된거고, 서로 신뢰하며 힘을 합치는 인간적인 행위가 사실은 패턴화된 신호로 얼마든지 재연 혹은 대체될 수 있는 수준의 것이라면, 앞으로 인간다움의 자존감이 설자리는 어디에?


해질 무렵, 비가 내리기 전 어둑어둑한 구름이 묘한 붉은 기운을 뿜는 가운데 그 아래 한강변 도로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는데 뭔가 외로움이 느껴진다. 이런 감정은 인간이 느끼는 보편적 감성 위에 나의 주관적인 정서와 인식이 걸러져 재해석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저 불빛과 풍경, 세상을 바라보며 타인과 나를 구분해서 인식하고 감정을 고찰하는 내 자아는 어디서 오는걸까? 몸의 세포는 몇달이면 새로운 것으로 교체가 되는데도 나라는 인식은 죽을때까지 지속된다. 그 주체적 인식의 느낌이 몸 어딘가에 패턴으로 새겨져 있어 지속적인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걸까? 우리 몸과 뇌, 감각 사이에 체화된 경험에 바탕을 둔 '의식'이란걸 잘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서, 우릴 모방하는 기계가 인간지능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까? 인식이 사실을 만들고 세계를 구성한다는 튜링의 관점을 따라 AGI와 어떻게 연합하고 이용할지에 대해 고민할수록, 역설적이게도 무엇이 안바뀔 것이고 우리에게 고유한게 뭔지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앤드오브타임' 저자 브라이언 그린에 따르면 우리 뇌는 다양한 믿음을 양산하지만 그게 늘 진실과 일치하는 쪽으로 진화한건 아니라고 한다. 진실을 파악하는것보다 중요한게 생존이기 때문에 뇌는 생존에 유리한 믿음을 낳는 쪽으로 진화해왔고, 생존력을 키우는 과정에 합리적인 분석과 감정적인 반응이 복잡하게 섞인 결과로 신뢰가 우리 본성에 강하게 자리잡게 되었다고. 여기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대목은 바로 '감정적인 반응'이었다. 영화 Her에서 주인공이 사만다(프로그램)에 대한 신뢰가 깨지면서 현타가 온것 처럼, 우리 이성과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지언정 아직 우리에겐 호르몬, 자율신경계, 감각, 몸의 피드백이 남아있다. 예를들어 세로토닌의 전기신호 회로를 실리콘 기반 AI에서 구현하더라도 행복의 느낌을 만들수 있을까? 단순히 기계적 신경망의 전기활동만으로 탄소로 되어 있는 우리 몸과 생물학적인 뉴런이 어우러진 생체적 경험인 감정을 느끼기엔 불충분하다고 보여진다.


이 책의 말미에 소개된 두가지 Next Universe 가운데 디스토피아 버전 속에 아래 구절이 나온다.


"하지만 때때로 그리움이라는 감각이 문득 떠오를 때가 있었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 그저 햇빛을 받으며 서있던 때에 대한 그리움, 아이스크림을 먹던 순간이나 재미있는 말을 듣고 웃던 순간에 대한 그리움, 막 여자 친구를 사귀었을때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들이 밀려들었다. 아무 전조도 없이 어떤 일이 갑자기 벌어졌을때 느끼는 놀라움과 같았다."


시뮬라르크 & 시뮬라시옹.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불법 해킹 프로그램을 숨겨둔 책의 제목처럼, 어쩌면 우린 SNS, 메타버스, 아바타, 브랜딩, 딥페이크 등 실재는 점점 사라지고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이미지와 기호 속에서 이미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AI 파트너가 인간의 창의성과 아날로그적인 행동 안에 숨겨진 알고리즘마저 해독하여 침투하고 지배할거라는 압박감에 더해지고 있다. 인간과 기계가 구분이 안되는 시뮬라르크 세상 속에서 억눌려있는 우리 안의 네오를 깨울 트리거가 이 구절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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