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I 이라영 『말을 부수는 말』
둘째가 스스로 이름을 쓸 나이가 되더니 언니 말투에 예민하게 굴기 시작했다. 자기한테 직접 하는 말도 아닌데, 얘, 쟤라고 자길 일컫는 소리에 참지 않는다. 언니가 나이가 많으니 그래도 된다고 얘길 해줘도 세상 억울한 표정을 풀 생각이 없다. 오늘 아침 식탁에서도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 너어~ 동생의 씩씩거리는 말투에 오늘은 언니도 마뜩지 않았나 보다. 서로 말꼬리를 잡고 유치원 동생은 얘라고 부르지 마, 초등학생 언니는 너라고 왜 부르냐, 틈을 주지 않고 팽팽하다. 결국 민감한(?) 호칭은 피하는 걸로 겨우 중재시키고 화장실에 들어가는데, 문밖에서 둘째가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아빠! 언니가 또 얘라고 했어!
그렇다. 우린 서로를 편하게 부를 'You'라는 호칭이 없다. ‘언니’처럼 위아래 위치를 부여하는 말 아니면 이름, 애칭뿐. 며칠 전 스레드를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반말의 어색함이 금새 가시는 걸 보면, 어쩌면 난 언제든 반말할 준비가 되어있었던게 아닐까 싶다. 편한 말투가 위계에 대한 의식을 덜어내니, 상대방 텍스트 이면에 감정과 가치가 더 깊게 다가온다. 서로 다른 궤도를 느슨하게 돌다가 짧게 링크되는 순간 우린 갓 정돈된 날 것의 생각을 주고 받았다. 그 기민함과 솔직함은 반말이 함의하는 동등함과 열려있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듯. 그럼에도 여전히 '너'라고 칭할 수 없어, 대신 치니(친한 스레드 유저)라는 호칭에 기댄다.
치니 한분이 그랬다. 가난 중에서 가장 무서운 가난은 바로 언어의 가난이라고. 주변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자신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언어의 가난에 살게 된다고. 어제 저녁 늦게 오랜만에 이모 전화를 받았다. 딸들이 많이 컸겠다면서 안부를 묻는 얘기에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아들 하나 넣으면 좋겠네, 내 상황을 자기중심적으로 단정 짓는 설명, 여호와의 증인을 어떻게 생각하냐 등 마음을 부쉬는 말이 이어졌고, 난 관심 없다고 잘라 말했다. 선택적 침묵을 마주한 일방의 언어는 갈피를 못잡더니 결국 더 강해진 어조로 성경을 읽으라는 독백으로 마무리됐다. 돌아서는데 기분이 다운되고 언어의 한계에 갇혀 있는 이모가 딱했다. 그냥 존재를 알아봐 주는 말조차 부족한 일상에, 우린 왜 이렇게 정확하지 않는 말로 서로를 괴롭히는 걸까.
여가(leisure)라는 단어는 '빈 공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여가를 즐기듯이 딱히 목적 없이 우리 사이에 뭐든 들어올 수 있는 빈 공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나이, 서열을 전제하는 언어가 들어서는 순간, 말할 것과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 정해져 있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위계에 기댄 자기중심적인 말 - 나의 에고, 느낌, 판단-을 넣기 시작하면 상대는 매우 곤란해진다. 이라영 작가가 그랬다.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권력의 망언이 난립하는 가운데 저항의 언어는 늘 순탄하지 못하다고. 언어는 일상의 감옥이며 해방구이고, 나와 타인을 공격하는 창인 동시에 방패이며 연대의 끈이 될 수도 있고 배척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했건만, 서로를 너라고 부를 수 없고 역할과 위계에서 출발한 우리의 상상력은 서로의 존재와 언어를 오롯이 끌어안기엔 빈약하다.
반면 위계를 덜어낸 빈 공간엔 순수한 호기심과 공감이 들어설 여유가 생긴다. 자기 제한적인(self limiting) 판단은 물러나고, 문지방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직관의 말이 가벼운 발걸음을 하며 들어선다. 나를 좀더 있는 그대로 드러내게 될때, 나의 취약성과 요청사항을 읽은 상대는 나에 대한 가정을 미리 조정할 수 있다. 이라영 작가가 얘기한 저항의 언어, 다시 말해 정확하게 보려고 애쓰고, 정확하게 인식하려고 애쓰고, 권력이 정해준 언어에 의구심을 품는 것. '얘'라고 부르면 어떤 느낌이 드니? 날 무시하는 것 같아. 더 나은 표현은 없을까? 이런식으로 요청하기와 허락 구하기가 원활하게 작동하면서 타인에 대한 민감도를 올리는 작업은, 다양한 존재들에 대한 인식을 뒤섞고 세계를 확장시켜 훗날 더 큰 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
자매는 언제 싸웠냐는듯이 베란다에서 놀고 있다. 첫째가 알파벳 퀴즈를 내면 둘째가 곧잘 대답한다. 그럴 땐 세상에 언니 밖에 없다. 그제 캠핑장에서도 둘이서 비눗방울을 불며 놀고 있는데, 네 살 정도로 보이는 또 다른 자매가 곁으로 다가왔다. 자기를 쫓아오는 꼬맹이들이 신기한 둘째는 미소를 감출 줄 모른 채 그 둘을 달고 한참을 놀다가 소리쳤다. 엄마 나 완전 인기 많아! 그 옆에서 우릴 지긋이 바라보며 미소짓는 자매는 쌍둥이란다. 아직 어른들로부터 서열을 규정당하기 전의 이쁜 아이들. 그들은 비눗방울의 경이로움과 둘째의 발랄함에 순수하게 이끌렸고 인싸가 되고 싶었던 우리 아이와 그냥 존재대 존재로 연결됐다. 어쩌면 우린 정확하게 보려 하지 않는 나태함과 얄팍한 무지 때문에 매번 말을 뭉개면서 상대로부터 이해받기만을 바라는건 아닐까.
토끼 인형을 안고 잠든 녀석에게 내일 동물원 가는 길에 물어봐야겠다. 언니의 말에서 어떤게 제일 마음에 걸리는지, 지금 참고 있는 게 뭔지, 언니랑 있는 가장 기분 좋은 장면에서 뭐라고 불리면 좋겠는지, 그리고 어떤 말로 되돌려주고 싶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