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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re Sep 25. 2021

길 위에서 인생의 길을 찾다. - 유럽

[런던] 그들의 사랑은 런던 거리의 네온사인보다 뜨거웠다.

나 홀로 떠난 두 달간의 유럽 여행, 그 첫 시작은 영국 런던이었다.

짧지 않은 기간이라 일정의 모든 숙소를 정해둘 수는 없었지만, 첫 여행지인 만큼 런던에서의 숙소는 한국에서 미리 알아보고 예약을 해두었다.

혼자 다녀야 했기에 위치가 중요했고, 두 달간의 여행을 위해서는 자금을 아껴야 했기에 가격 역시 중요한 요소였다.

너무 외진 곳에 있으면 야경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위험할 수 있을 것 같아 가급적 시내에 위치한 호스텔을 예약하고 싶었고, 그렇다고 고급 호스텔을 예약 하기에는 두 달간의 여행 경비가 만만치 않은 배낭여행자의 주머니 사정 때문에 가급적 저렴한 곳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렇게 중요한 사항들을 고려해 결정된 런던에서의 첫 번째 숙소는 피카딜리 서커스 역에 위치한 뮤지컬 그리스 극장 바로 옆의 호스텔이었다.

호스텔인 만큼 낯선 사람들과 한방에 같이 있어야 했지만, 그나마 그중에서 최선의 선택은 인원이 가장 적은 4인실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간혹 여자전용 방을 구분해 운영하는 곳도 있었지만 가격도 높았고, 전체 객실 중에 여성전용 4인실 룸 한두 개 정도 있을까 말까 한 수준이었기에 남녀 공용 도미토리를 예약해야 했다.

요즘에는 여성을 위한 객실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내가 여행을 했던 시기만 해도 그리 많지는 않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피카딜리 서커스 역 그리스 극장



4인실 도미토리를 예약하고 숙소에 도착하니 침구류나 객실 상태는 생각보다 깨끗하고 정돈이 잘된 편이었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공용으로 사용해야 했지만 역시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어 만족스러웠다.

철제로 된 2층 침대 두 개가 놓인 구조에 개인 물품을 보관할 수 있는 캐비닛이 별도로 준비되어 있었다.

예약 시 침대 위치까지 정해지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체크인을 했을 때 비워져 있는 침대를 사용하면 되는 방식이었고, 다행히도 내가 첫 번째 체크인을 한 사람이라 1층을 사용할 수 있었다.

잠시 외출을 하고 돌아오니 반대편 침대 1층에는 남자가 사용 중이었고 2층에는 커플이 각각 침대 한 칸씩 사용 중이었다.

반대편 침대에 있던 남자는 나처럼 혼자 유럽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고, 2층의 커플 역시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행하는 중이라고 했다.

커플 중에 여자는 나와 같은 침대 2층을 사용하면서 내가 들어가니 허리까지 침대 밖으로 내밀어 가며 나에게 악수를 청하고 밝은 미소로 반겨줬다.

상당히 밝고 쾌활한 성격인 듯 보였다.

뒤이어 들어온 남자와도 가볍게 인사를 나눴고, 짧은 시간이지만 잘 지내보자는 훈훈한 이야기 몇 마디가 오고 간 후 휴식과 짐 정리 등을 하며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혼자 하는 여행에 대한 걱정과 앞으로 이어질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교차하며 먼길을 달려왔던 나는 피곤함이 몰아쳐 조금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침대에 진동이 느껴지며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 뭐지..?’ 하는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눈이 다 떠지기도 전에 침대의 진동과 박자를 맞추어 들리는 신음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쪽 팔만 바닥에 기댄 채 몸을 다 일으켜지도 못한 상태로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눈만 점점 더 커져갔다.

‘설마’라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이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하... 세상에!

짧은 외국 생활의 경험이 있는 나였지만,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런던 거리의 네온사인 불빛 덕분에 반대편 침대가 어렴풋이 보였는데, 2층에는 사람이 없었다.

1층에 누워 있던 남자는 나와 마찬가지로 몸을 다 일으켜지도 눕지도 못한 채로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실루엣 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내 침대는 점점 더 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소리도 더욱 격해지고 있었다.

조용히 하라고 항의를 해도 되는 일인지 안 되는 건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멍해지기만 했다.

말을 한다면 당사자들에게 직접 해야 하는 건지 호스텔 측에 해야 하는 건지, 말한다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지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누워 있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옆 침대 남자는 그나마 소음만 들릴 뿐이지만 나는 그들의 사랑을 온몸으로 같이 느낄 필요가 있는 걸까..?'

‘이러려고 나한테 그렇게 친한 척 상냥한 척 인사를 건넨 건가...’

별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멍하니 흔들리는 침대를 바라보다가 문득 철재로 된 침대 프레임 사이 2층 매트리스가 눈에 들어왔다.

별다른 받침대도 없이 철재 프레임 위에 그대로 매트리스가 놓여 있어 1층에 누워 있으면 2층 침대의 매트리스가 보이는 형태였다.

나는 천천히 한쪽 발을 들어 프레임 사이에 매트리스를 힘껏 밀어 올렸다.

격정적이던 그들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고 방안에는 두 남녀의 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정적 아닌 정적이 흐르고 몇 초가 지났을까, 멈칫했던 그들은 다시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발을 올려 매트리스를 처음보다 조금 더 강하게 밀었지만 이번에는 멈추기는커녕 움직임과 신음 소리는 점점 더 절정으로 치닿고 있었다.

두 번 정도 더 밀어 봤지만 오히려 내 발이 밀려날 정도의 격한 움직임만 지속될 뿐 전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옆 침대의 남자는 이미 포기했는지 어느새 벽 쪽으로 돌아누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체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만 하라는 암묵의 신호를 보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 더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거면 2인실을 들어가지..’

‘돈이 없었나?’

‘예약을 못한 건가?’

격렬한 진동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보내던 나는 어느새 합리화를 해가면서 그들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격렬한 진동이 한참이나 이어진 뒤에야 더더욱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멈췄고, 이미 잠이 깨버린 나는 그 뒤로도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짐 정리하던 중에 찍은 침대 사진 - 이때는 알지 못했다. 그 밤에 무슨 일이 생길지..




다음날 아침, 씻고 오니 부스스한 얼굴로 ‘Sorry’를 연발하는 남자와 아직 침대에 누워 눈만 겨우 떠진 얼굴로 나에게 'Good Morning~'을 외치는 여자가 나를 반겨 주었다.

화가 나면서도 화가 안 나고, 웃음이 나오면서도 웃어지지 않는 묘한 감정 때문인지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어색한 표정으로 'G.. Good.. Morning...'이라고 대답 하고는 서둘러 준비하고 나와 버렸다.


격렬한 밤을 보낸 덕분에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한 데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나오느라 몽롱한 상태를 깨우기 위해 커피 한잔으로 런던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잔과 아침식사 대용으로 먹을 머핀을 시키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행 계획을 세워 보려고 책을 펼쳤는데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헛웃음이 세어 나왔다.

당시에는 당황하고 어이없고 화가 났는데, 혼자 나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남자와 여자, 사랑, 애정 표현, 스킨십, 섹스.

몇 년 전 찾아온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로 그 모든 것들에 대해 트라우마를 겪고 있던 나에게 커플의 뜨거운 밤은, 쓰디쓴 약을 억지로 삼키고 난 뒤 입안에 남은 씁쓸함이 없어지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경험이었다.

문화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그저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그들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 걸까, 타인의 시선과 질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본능에만 충실한 그들이 이상한 걸까.

트라우마를 없애거나 혹은 내가 없어지거나, 둘 중에 하나는 해보자는 심정으로 떠나온 여행에서 하필이면 첫날밤부터 내 머릿속을 여러 가지 생각으로 꽉 채워줄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인지 '하필이면..'이라는 생각이 들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꼬리를 물어 생각하다 보면 끝도 없을 것 같아 그저 여행 중 하나의 해프닝으로 생각해 버리자 하며 커피와 여행책에 다시 집중했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신나게 구경을 하다가 어느덧 숙소에 돌아갈 시간이 되자 문득 오늘 밤이 걱정됐다.

'설마 또 그럴까? 오늘은 피곤해서 또 그러면 너무 화 날 것 같은데...'

'에이.. 설마.. 아침에 미안하다고 했으니 안 그러겠지..'

숙소에 다다를수록 설마 하는 마음과 이번에는 참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반복하다가 방으로 들어섰다.

약간은 긴장된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커플은 없고 여자 두 명이 새로 들어와 있었고 반대편 1층에 있던 남자도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들 원래 1박만 머무를 생각이었는지 다른 이유로 떠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덕분에 런던에서의 남은 기간은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여행 시작과 함께 경험했던 런던에서의 격렬한 밤은, 후에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웃으며 여행 경험을 공유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였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일도 겪었다' 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꺼낸 건데, 오히려 나와 비슷하거나 혹은 더한 경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와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웠던 건 무려 20인실 정도의 룸에서 사랑을 나눈 커플의 이야기였다.

유럽 각지에는 지역의 특성이나 물가의 영향으로 꽤 많은 인원이 머무는 다인실을 보유한 호스텔이 많은 편이었다.

내가 여행하며 머물렀던 숙소 중에 가장 많은 인원이 머물 수 있는 곳은 8인실 이였지만, 여행경비를 아끼기 위해 저렴한 곳을 찾는 여행자들 중에는 10인실 이상의 룸을 이용하는 경우도 꽤 많았다.

이탈리아 숙소에서 만났던 남자분도 그런 이유로 20인실 룸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사랑을 나눈 커플이 있었다고 했다.

초저녁이라 사람들이 대부분 밖에 나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한 커플이 이불을 뒤집어쓴 채 사랑을 나누었고, 그 사이 하나둘씩 숙소에 돌아온 사람들이 어느새 침대 밑에 모여들어 커플의 움직임을 구경했다고 한다.

워낙 많은 사람이 머무는 곳이라 그 정도의 해프닝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인 건지 누구 하나 욕을 하거나 불쾌해하는 것 없이 그저 재미있는 구경거리 하나 생겼다는 표정들로 침대 밑에 서서 한참을 구경하며 즐거워했고, 커플이 절정에 다다르자 다들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까지 쳐줬다고 한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커플은 절정의 시간이 끝나자 이불 밖으로 얼굴만 내밀고는 땡큐를 연발했고, 사람들은 마치 볼일이 끝났다는 듯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머무는 방에서 사랑을 나눈 커플도 대단하고 그들을 재미있는 구경거리 마냥 쳐다보고 웃어넘겼던 사람들도 대단한 것 같았다.


한국에 돌아와 여행에 대해 묻는 친구나 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 대부분,

'에이~ 말도 안 돼~'

'설마~!'

'미친 거 아냐? 진짜야?'

등등의 반응을 보였다.

나 역시 그랬을 것 같다.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 있음에도 다른 사람의 경험담을 들을 때면 '에이~ 말도 안 돼~'라는 말이 저절로 쏟아져 나왔으니 말이다.

그렇게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절대 공감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경험하는 것으로 여행의 시작을 알리며 두 달간의 힘겹고도 즐거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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