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못 지킨 댓가
제11장: 첫 번째 겨울(1)
1973년, 영국 과학연구위원회
제임스 라이트힐 경(Sir James Lighthill)은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을 마치고 펜을 내려놓았다. 케임브리지 대학 응용수학 교수이자 유체역학의 권위자. 그리고 지금, 영국 정부가 요청한 AI 평가의 집필자. 6개월간 영국의 모든 AI 연구를 조사했다. 에든버러 대학, 서섹스 대학, 각종 연구소들. 꽤 많은 연구자들을 만나고, 논문을 읽고, 데모를 보았다. 이제 결론을 써야 했다.
그는 데이터를 다시 펼쳤다. 1960년대의 약속들과 1970년대의 현실. 격차가 컸다. 너무 컸다.
"대부분의 AI 연구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문장을 다시 읽었다. 가혹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조합 폭발(Combinatorial Explosion)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조합 폭발. AI의 고질병이었다. 간단한 문제는 풀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복잡해지면 가능한 경우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컴퓨터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실험실에서의 성공이 실제 세계로 확장되지 않는다."
그는 마지막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이 분야에서 발견된 것 중 어느 것도, 부분의 합 이상은 아니다."
냉정했다. 어쩌면 너무 냉정했다. 하지만 그는 과학자였다. 데이터가 말하고 있었다.
보고서는 1973년에 발표되었다. "Artificial Intelligence: A General Survey"
영국 의회의 결정
영국 의회는 즉각 반응했다.
"AI 연구 예산을 대폭 삭감한다."
에든버러 대학의 도널드 미치(Donald Michie) 교수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는 영국 AI의 선구자였고, 2차 세계대전 중 블레츨리 파크에서 앨런 튜링의 동료로 함께 일하며 서로 기계학습과 인공지능에 대해 많은 토론을 나누었던 사이였다. 그는 의회 청문회와 왕립연구소 토론회에 섰다.
"라이트힐 교수는 AI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인지 절망인지.
"우리는 장기적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10년, 20년을 내다보는 연구입니다. 즉각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의원 한 명이 물었다.
"그럼 언제 결과가 나옵니까?"
이 논쟁은 미치의 패배로 끝났고 예산은 삭감되었다. 연구실이 문을 닫았고 연구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학생들은 다른 분야를 찾아 떠났다.
첫 번째 겨울이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1974년, 미국 DARPA
비슷한 일이 대서양 건너편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워싱턴 D.C.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 본부. 1960년대 AI 연구의 최대 후원자.
내부 검토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지난 10년간 투자 대비 성과를 평가하겠습니다."
프로젝터 화면에 목록이 떴다.
1960년대의 약속들:
"10년 안에 기계가 체스 챔피언을 이긴다"
"자동 번역이 곧 완성된다"
"범용 문제 해결 시스템"
1974년의 현실:
체스: 아직 아마추어 수준
기계 번역: 실용성 없음
범용 문제 해결: 작동 안 함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한 관리자가 말했다.
"결론은 명확합니다. 기초 AI 연구 지원을 중단하고, 특정 응용 분야만 선별 지원 원하겠습니다."
예산 삭감. 스탠퍼드, MIT, 카네기 멜론 대학의 AI 연구소들이 타격을 받았다.
존 매카시가 스탠퍼드 연구실에서 한탄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약속했다."
1980년, 스탠퍼드 대학
하지만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것은 아니었다.
에드워드 파이겐바움(Edward Feigenbaum) 교수가 컨퍼런스 단상에 섰다. 청중 약 100명. 대부분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AI라는 단어 자체가 저주가 된 시대였으니까.
"우리는 잘못된 목표를 추구했습니다."
청중이 술렁였다. AI의 대부 중 한 명이 실패를 인정하는 건가?
파이겐바움이 계속했다.
"범용 인공지능.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AI."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직 너무 어렵습니다. 우리가 과소평가했습니다."
침묵.
"하지만 포기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는 칠판으로 걸어가서 크게 썼다.
전문가 시스템 (Expert Systems)
"좁은 영역에 집중합시다. 의학 진단. 화학 분석. 컴퓨터 구성." 그가 청중을 둘러보았다. "각 영역의 전문가 지식을 규칙으로 만드는 겁니다."
한 연구자가 손을 들었다.
"그게 AI입니까? 단순한 규칙 집합 아닙니까?"
파이겐바움이 미소 지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AI입니다."
MYCIN - 의사보다 나은 시스템
1970년대 중반, 스탠퍼드 의과대학. 에드워드 쇼틀리프(Edward Shortliffe)의 박사학위 논문.
“Computer-Based Medical Consultation: MYCIN”. 혈액 감염 진단 시스템.
쇼틀리프는 의사들을 인터뷰했다. 수십 시간씩.
"환자에게 열이 있고 백혈구 수치가 높다면?"
"혈액 배양 결과를 봅니다."
"그람(Gram) 양성 구균이 나오면?"
"포도상구균 감염 가능성이 높죠."
모든 대화가 규칙이 되었다.
IF 환자에게 열이 있고
AND 백혈구 수치가 높고
AND 혈액 배양에서 그람 양성 구균 발견
THEN 포도상구균 감염 가능성 90%
RECOMMEND 항생제 XXX
약 600개의 규칙. 1979년, 평가 시험.
MYCIN vs 인간 의사들. 30개 케이스.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
MYCIN: 69%
일반 의사: 62%
전문의: 80%
MYCIN이 일반 의사보다 나았다! 파이겐바움이 흥분했다.
"이겁니다! AI가 실제로 도움이 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역설이 있었다. MYCIN은 실제 병원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단 한번도.
법적 책임. 의사들의 저항. 시스템 통합의 어려움.
"기계가 잘못 진단하면 누구 책임입니까?"
그럼에도 MYCIN은 증명했다. 전문가 시스템이 가능하다는 것을.
1980년, XCON - 돈이 되는 AI
매사추세츠, 메이너드. Digital Equipment Corporation(DEC) 본사.
엔지니어링 부사장이 화를 내고 있었다.
"주문 오류율이 31%라고?"
문제는 이랬다. DEC의 VAX 컴퓨터는 모듈식이었다. 고객 맞춤형. 수천 가지 조합.
하지만 모든 조합이 작동하는 건 아니었다.
"이 메모리는 이 CPU와 호환 안 됩니다." "케이블이 짧습니다." "전력 부족입니다."
고객 불만은 쌓여갔고, 수리 비용은 감당할 수준을 넘고 있었다. 악몽.
1980년, 카네기멜론의 존 맥더못(John McDermott) 교수가 제안했다.
"전문가 시스템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DEC은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시도했다. XCON (eXpert CONfigurer) 개발.
베테랑 엔지니어들을 인터뷰했다.
"VAX-11/780에 4MB 이상 메모리를 달면?" "H7120 전력 공급 장치가 필요합니다." "왜죠?" "전력 소모가 300W를 넘으니까요."
모든 대화가 규칙으로. 첫 버전: 480개 규칙.
1982년 가동. 오류율: 30% → 2%
연간 절감액: 4천만 달러
성공이었다. 진짜, 측정 가능한, 돈이 되는 성공!!
1982-1985, AI 붐
XCON의 성공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DEC이 4천만 달러를 절감했다고?"
1984년, 비즈니스 잡지들이 AI 특집을 실었다.
"인공지능 혁명" "전문가 시스템이 산업을 변화시킨다"
갑자기, 모두가 AI를 원했다.
Fortune 500 CEO들이 물었다.
"우리도 AI 전략이 필요하지 않나?"
컨설팅 회사들이 생겨났다.
Teknowledge - 1981년. 스탠퍼드 출신들.
IntelliCorp - 파이겐바움 공동창업.
Carnegie Group - 피츠버그.
실리콘밸리가 들썩였다. 1984년엔 매주 새로운 AI 스타트업이 생기는 것 같았다. Symbolics는 상장했고, LISP 머신 회사의 주가는 급등했다.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기업들이 줄 서기 시작했다. 1970년대 떠났던 연구자들이 돌아왔다. "AI"를 다시 자랑스럽게 쓸 수 있었다.
첫 번째 겨울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역사적 주석
제임스 라이트힐 보고서 (1973): 영국 과학연구위원회를 위한 AI 평가. "Artificial Intelligence: A General Survey". AI의 과대 약속 비판. "in no part of the field have the discoveries made so far produced the major impact that was then promised"(이 분야의 어느 부분에서도 지금까지 이루어진 발견들은 당시 예상했던 만큼의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도널드 미치 (1923-2007): 튜링의 제자. 에든버러 대학 AI 선구자. 라이트힐 보고서에 강력 반대.
MYCIN: 스탠퍼드, 에드워드 쇼틀리프. 혈액 감염 진단. 600개 규칙. 1979년 평가에서 일반 의사(62%)보다 높은 정확도(69%). 하지만 실제 병원 미사용
XCON: 카네기멜론 존 맥더못, DEC용. 컴퓨터 구성 시스템. 오류율 30%→2%. 연간 4천만 달러 절감. 초기 480개 규칙, 1986년 10,000개 이상.
에드워드 파이겐바움 (1936-): "전문가 시스템의 아버지". 스탠퍼드 교수. IntelliCorp, Teknowledge 공동창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