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

한뼘자전소설 습작

by 창창한 날들

사진 출처 pixabay



대학 2학년 1학기 여름방학의 끝자락에 휴학 결정했다. 학교를 떠나 사회 경험을 할 필요를 느꼈고, 무엇보다 등록금 마련이 절실해서였다.

백화점과 식당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공부와 학생운동에서 거리를 둔, 그래서 내게는 무의미한 날들이 흐르고 있었다. 서비스는 진정한 노동인가,라는 문제의식도 나를 괴롭혔다.


대학 연합 동아리에서 공동 시 창작 활동으로 친해진 U대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 같은 내 모습에 의기소침해진 나는 친구들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남자애들이 대부분인 여덟 명의 친구들과 1차는 술집에서, 2차는 동아리 방에서 마시다가 취한 나는 한 친구가 자취방에서 자고 가라고 권했지만 고집을 부리고 교문을 나섰다.

U 대학에서 버스로는 두 번을 갈아타고 1시간이 넘게 돌아가야 하는데, 전철로는 30분 정도 잡으면 되었다. 새로 생긴 그 역을 한 번도 이용해 보지 않아 걱정이 되었으나 자정이 되기 전에 귀가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여 전철 막차에 올랐다.


출구 방향을 잘못 잡는 바람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허허벌판 앞에 섰다. 사방이 어두워 사물이 분간되지 않았다. 그린벨트 지역이던 전철역 주변에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서고 있을 때여서 거대한 크레인 불빛만이 드문드문 보였다.

토악질을 하고 집 방향을 찾아 휘청거리며 걷는데 뒤편에서 나를 따라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여기 위험한데 도와드릴까요?"

키가 훤칠한 남자였고 목소리가 젊었다. 나보다 많으면 서너 살쯤.
"집에 가야 하는데 집을 못 찾겠어요."

두 눈이 거의 감긴 채 혀가 꼬부라진 발음으로 중얼거리는 나의 팔꿈치를 그가 잡았다.

"이 팔 놓으세요. 저 집에 가야 한단 말이에요."

"집이 어디예요?"

"알아서 뭐 하시려고요?"

남자와 실랑이를 하다가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연석에 주저앉았다. 머뭇거리던 남자가 내 옆에 엉거주춤하게 앉으려 했으나, 나는 남자가 나를 어떻게 할까 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얼른 갈 길 가세요. 저는 제가 알아서 갈 수 있어요."

"어떻게 놓고 가요. 건너편 택시 탈 수 있는 곳에라도 데려다 줄게요."

택시 탈 수 있는 곳?
남자의 부축을 받고 어둠 속을 걸었다.

장소가 바뀌어 우리 아파트 현관문 앞에 휘청거리는 내가 서 있다. 남자가 나를 부축해 데려다준 걸까.


다음 날 아침 아버지가 술 깨는 약을 건네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나 문을 두드리던지, 그렇게 취해서 도대체 어떻게 집을 찾아온 거야? 현관문 밖에 주저앉아 있던데."

"제가요? 저만 있었어요?"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무서운 줄도 모르고 여자 혼자서."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데, 그는 나를 문 앞에 데려다 놓고 간 걸까.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모르겠으니 나란 사람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인지.

머리가 깨질 듯 아픈 걸 참으며 병째 마신 뒤 내려놓으려는데 손바닥에 전화번호로 보이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907-5959

'뭐지? 오구, 오구...'

장난말 같은 전화번호의 정체가 무얼까 미간을 찌푸리며 어제 친구들 중 누구와 접촉을 했더라 복기하기 시작했다.

민기, 준기, 승영, 상준...

다 잡았네. 젠장. 머슴애들이랑 손 잡을 일이 뭐가 있었어?

내 머리를 쿵쿵 치고 시계를 보니 첫 수업이 물 건너갔다! 아니다. 나 휴학했지. 아니지 방학이지. 필름이 끊기게 술을 마시니 머리가 나빠졌다고 느끼며 지난밤의 술을 나는 왜 이기지 못했는가 자책하는 중에 시간이 흘렀다.


내가 벗어 놓은 바지, 점퍼, 양말이 봉긋하게 문 안쪽으로 쌓여 있었다. 옷들에서 담배 쩐내와 쉰내, 술냄새가 섞인 오묘한 향이 풍겼다. 바지와 점퍼 주머니를 세탁기에 넣으려고 탈탈 터는데 꼬깃꼬깃하게 접힌 포스트잇이 떨어졌다.

907-5959, 고현빈

연락 기다릴게요.

고현빈. 모르는 이름이었다. 지난밤의 그 남자 번호라면.

필름이 끊겼을 때 미심쩍은 증거물이 없다면 상관없지만, 기억도 못하는 증거물이 나오면 미칠 노릇이다.

정오를 넘기도록 그 종이를 서랍장에 올려놓은 채 집안을 왔다 갔다 하며 고민했다. 오구오구에 전화를 걸어야 하나 말아야.

'그래. 인생 뭐 있나. 못 먹어도 GO다!'

한때 자타 공인 타짜 인생을 살았던 아버지가 농담처럼 자주 하는 말이 이런 때는 핑계가 되어준다. 그래 GO다. 할까 말까 할 때는 해야 하는 거라며.

벨소리가 이어지고 드디어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현빈입니다. 용건을 남겨 주세요.'

녹음된 목소리였다. 그 남자 목소리인 것 같았다.

"저기요... 어제..."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제가 고현빈입니다."

남자가 직접 수화기를 들고 말했다.

"어젯밤 녹천역에서..."

"아, 네. 전화 주셨네요."

"네, 어제는 감사했습니다. 제게 전화번호를 남기셨던데..."

"네, 제 번호 맞습니다. 제가 말한 건 생각해 봤어요?"

무엇이라 말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혹시 나더러 사귀자고 한 거야? 그렇담 나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의 훤칠한 키와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한테 첫눈에 반한 거야?

그가 물었다.

"대답을 들려주려고 전화한 게 아닌가요?"
무슨 대답을 들려달란 말인가? 네, 그럼 우리 사귀어요, 그런 말?

남자의 목소리가 어제 '도와드릴까요?'라고 물을 때와는 달리 사무적으로 느껴졌지만, 전화기 너머니까 그럴 수도 있으리라. 내가 어젯밤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신중한 듯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

"제가... 그러니까..."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 180센티미터 정도의 훤칠한 남자는 가까이 다가온 적이 없었는데, 웬 복이 터졌대. 어제 아침에 나갈 때 신문에 나온 띠별 운수가 생각났다.

'동쪽으로부터 귀인이 옵니다. 그를 알아차리면 복, 몰라보면 액운이 들 수 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그를 대하세요. 좋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어제 만난 사람 중 동쪽의 귀인이라면 그 남자밖에 없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이러다 귀인이 애인이 되는 것 아냐. 게다가 내 이상형이 키 큰 사람이었다는, 나에 대한 새로운 발견까지 했다.

"학생이 함께 일할지 여부를 오늘 오전에 전화 주겠다고 했잖아요."

일한다고? 무슨 일? 혼란스러운 머리가 정리되지 않았다.

"어제는 절실하게 일할 곳이 필요하다더니 밤사이 바뀐 거예요? 아버지한테 상의해야 한다면서요. 공장이라서 반대할지도 모르겠다고요."

남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랬구나. 그런 거였어. 귀인은 귀인이지 않은가.

전화를 끊은 뒤 귀인을 놓칠세라 공장 주소를 중얼거리며 서둘러 청바지에 발을 꿰었다.




<후기>

2020년에 마지막 단편 소설을 쓴 뒤 더 이상은 소설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복면글왕 글쓰기 밴드에서 '당신의 인생에서 드라마틱했던 순간을 말해 보라. 이때 비밀 한 가지와 거짓말 한 가지를 이야기에 넣어야 한다'라는 1월의 미션 시제가 주어졌고, 덕분에 이 글이 나왔다.

오랜만의 소설 창작 시도, 4일 동안 연재하면서 적잖이 흥분되었고, 이렇게 저렇게 구상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연재한 덕분에 날마다 댓글로 반응을 보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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