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천자(14,000자)는 첫 문장부터

단편 소설 쓰기 연습하는 중

by 창창한 날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단편 소설(원고지 70~100매) 창작을 배웠고 여러 편 썼다.
그때만 해도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단에 기대를 걸었는데, 2019년에 안산으로 돌아와서는 그 꿈이 꿈으로만 남을 것 같고, 자신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외도는 이제 그만하기로 하고 돈 버는 일에 열중하기로 했다.


어떠어떠한 계기로(참 이상한 우연이 가지를 쳤달까) 4월 초부터 5월 말까지 딱 8주간의 힘든 창작교실에 갑자기 신청하게 됐다. 작가와의 인연도 있었지만, 대학원 지도교수와 우연히 통화됐을 때 "졸업해야지."라고 염려 섞인 은근한 권유 덕분에 내가 나태했구나 하고 자각하여 다시 창작소설반에 접수 신청을 하였다.

그런데 단편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에 어떤 에너지로 원고지 80매씩을 썼는지 스스로도 기이할 정도였다.


하는 수 없이 4년 동안 멀리 두었던 단편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특히 도입부, 첫 문장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소설로 탈바꿈될 것이고, 전에 첫 문장 지적을 많이 받았던 터라 여러 소설가들의 첫 문장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이런 첫 문장이 100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것을 보라.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변신-카프카)


내가 아는 한 우리나라 현대 작가 중 개성 넘치게 쓰는 황정은의 첫 문장들을 다시 읽었다. 역시 멋져. 내가 따라 하기도 불가능한 그녀의 상상력은 넘사벽이다.


그리고 그녀는 노트가 한 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명실-황정은)
초인종이 울렸을 때 그녀는 잘 닦이지 않는 얼룩을 닦고 있었다. (누가-황정은)
떨어지고 있다. 삼 년은 지났을 것이다. (낙하하다-황정은)
그대는 이 기록을 눈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뼈 도둑-황정은)
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장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야만적인 앨리스씨-황정은)


아, 그렇지. 내가 좋아했던 첫 문장을 지닌 소설들이 더 있다.


그해 여름 음력 7월 12일에 할머니가 죽었다.(그 여름의 수사-하성란)
이 냉장고의 전생은 훌리건이었을 것이다.(카스테라-박민규)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채식주의자-한강)
그의 차로 말할 것 같으면 그의 인생을 모두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일단 다섯 사람이 탈 수 있지만 뒷좌석에 짐이 차 있고 조수석은 조수석대로 당장 필요한 자질구레한 소지품들이 쌓여있기 때문에 사실상 그 차는 오직 그, 공상수 한 사람을 위한 차였다.(경애의 마음-김금희)


그러다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를 읽었다. 독립 서점에 방문했을 때 사 온 책 '동네서점 베스트 컬렉션'에 들어 있던 작품으로 막장 콩가루 집안의 이야기다. 그 작품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하며 내 목덜미를 잡고 마구 달렸다. 마지막 문장까지 휘몰아친다. 삐딱한 소녀의 입담으로.


오빠가 돌아왔다. 옆에 못 생긴 여자애 하나를 달고서였다. (김영하)


열네 살 여자애가 바라보는 가족 이야기는 기상천외하고 씁쓸했다. 소설 속의 모든 캐릭터를 이해하게 만드는 게 소설가의 몫이라면 김영하는 정말 대단하게 그 미션을 해냈다.




여러 단편의 첫 문장 찾아보기, 흉내내기를 해 보았다고 해서 내 문장을 썼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무얼 바라고 이번 도전을 하게 되었을까. 연일 후회하며, 쓰며를 반복했다. 덕분에 지난 연말부터 마셔대던 술은 끊었지만...

일주일에 두 번은 치러 가던 볼링도 멈추고, 웬만한 약속들은 다 미루고, 더 이상의 약속을 하지 않기 위해(덜컥 약속 잡을까 봐) 입을 꼭 다문 채 동굴 속에서 궁둥이 붙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첫아이를 단 4시간 만에 낳은 내가 단편소설을 낳는 데는 무지하게 진통 시간이 길다.

나의 첫 문장은 도대체 어떤 녀석이기에.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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