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따는 풍경-1

거룩한 글쓰기 시즌 8 - 2023년 10월 1일(31일 차)

by 창창한 날들


1.

성훈이 들어오지 않는 밤이었다.
회식에 가든 문상을 가든 웬만하면 당일을 넘기지 않고 귀가하는 성훈이 새벽 세 시를 넘기고도 소식이 없었다. 예주는 별별 상상을 하는 자기의 머리를 가로저으며 휴대폰을 켰다. 회사 간부의 조모상에 간다는 문자가 마지막이었다. 성훈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신호음만 울렸다.

예주는 소파에 모로 누웠다. 까무룩 잠들었을 때, 도어록의 버튼음이 들렸다. 문은 열리지 않고 버튼을 누르는 소리만 들렸다. 현관 가까이로 살금살금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성훈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야 나. 민재 엄마. 오예주 씨…….”

예주가 문을 열자 성훈이 무너지듯 예주의 가슴으로 쓰러졌다. 성훈의 팔을 잡고 정신을 차리라는 예주를 성훈이 두 손으로 막는 자세로 흐느끼듯 말했다.

“제 몸 만지지 마세요. 전 그런 거 아니거든요…….”

성훈이 옷을 한 꺼풀 한 꺼풀 벗어 거실에 늘어놓으며 안방 침대에 엎어졌다. 예주는 양복에서 휴대폰과 손수건, 지갑을 꺼내 소파 옆의 협탁에 올려놓았다. 지갑 밖으로 튀어나온 꾸깃한 영수증들이 보였다. 예주는 그것들을 따로 꺼내 두고는 양복의 가슴 부위에 묻은 얼룩을 물수건으로 닦았다. 양복에서 안주와 담배와 또 다른 어떤 것들이 섞인 악취가 났다. 예주는 냄새를 빼려고 베란다에 옷가지를 걸었다.

부부 침대 옆에 놓인 어린이 침대에 민재가 제 아빠와 비슷한 포즈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어린이집에서 현장학습을 다녀온 민재는 초저녁에 소파에서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앉은 채로 잠들었다. 아기 때부터 엎드려 자는 아이를 돌려놓으면 획 돌아 엎어지곤 하던 아이다. 예주는 순한 게 고집은 있어가지고 하며 민재를 바로 누인 뒤 이불을 끌어 덮어주었다. 울상을 하고 잠든 성훈의 양말을 벗겨서 거실로 들고 나왔다.

예주는 소파에 앉아 영수증을 보았다. 신용카드 내역일 거라 짐작하며 한숨을 쉬었다. H호프, A노래방까진 그러려니 했는데 S호텔이라니. 각각 39,000원, 350,000원, 150,000이었다. 성훈의 신용카드 번호로 결제된 것을 확인한 예주는 영수증에 찍힌 여섯 자리의 숫자를 다시 보았다. 다이어리에 영수증을 끼운 뒤 거실 전등을 끄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539,000원, 크다면 크고 적다면 적은 돈이라 할 수 있지만 그들의 처지에서는 너무나 큰돈이었다. 성훈은 그런 큰 액수라면 상의하고 결제하는 사람이었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영수증을 지갑에 넣어온 이 남자의 진심은 무엇일까. 성훈에게서 얼마만큼의 진실을 들을 수 있을까.

예주는 무심코 다이어리를 넘기다 ‘사과 따는 풍경’이라고 제목만 적어둔 페이지에서 멈추었다. 사과 따는 철도 아닌 삼월 말에 왜 이런 제목을 썼던 걸까. 제목만 적었다가 틈 나는 대로 일기를 적기도 했으나 ‘사과 따는 풍경’에 대해서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지러지는 달빛이 예주의 얼굴을 비추었다.



단기 프로젝트로 써야 할 다른 글이 있는 데다 4일, 이사를 앞두고 매일 인증글에 집중하기 어려워 창고 대방출(?)을 하기로 결정했어요.
하지만... 그건 핑계고요.
에세이도 그저 그렇더니 소설도 그저 그렇군, 하는 감상을 드리게 될까 두려워 오랫동안 망설였던 터에 올해 말까지 이런저런 시도를 다 해 보기로 하여 올려봅니다.
문예창작학과 수료를 몇 달 앞둔 그해 여름은 미래가 불안하여 날마다 잠을 설치던 때였어요. 안산에 돌아와도 내 자리가 없어 뭐 해 먹고 살아야 하나 싶었거든요. 그 와중에 극도의 불안은 소설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네요.
2018년에 쓴 단편소설을 일주일 정도 연재할 계획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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