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따는 풍경-2, 3

거룩한 글쓰기 시즌 8 - 31일 차, 32일 차

by 창창한 날들




거룩한 글쓰기 시즌 8 - 31일 차, 32일 차
2.


이튿날 성훈이 초주검이 되어 현관에 들어섰다. 화장실에서 손만 씻고 나온 성훈은 소파 아래에 기대어 앉아 텔레비전 리모컨을 찾았다. 영수증에 대해선 까맣게 잊은 사람 같았다. 그는 시원한 음료를 찾았다.

예주가 녹차 티백을 뜨겁게 우려내어 성훈에게 가져갔을 때 성훈은 소파에 등을 대고 입을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예주는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전원을 끄고 협탁에 올려놓은 뒤 쟁반을 바닥에 놓았다. 텔레비전 소리가 사라지자 성훈이 눈을 뜨고 두리번거렸다. 흰자에 빨갛게 핏발이 서 있었다. 성훈은 다리를 들어 리모컨을 찾다가 예주의 시선을 느끼고 녹차를 다급히 들이켰다.

“앗 뜨거워, 뜨거워.”

호들갑스럽게 혀를 날름거리는 성훈을 못 본 체한 예주는 티백을 쟁반 위에 꺼내놓았다. 침착한 예주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성훈은 그게 무언지 가늠을 하지 못하고 선하품을 하였다.

“아침에 민재 잘 갔나. 혼자 어린이집 보내느라 애썼지.”

예주는 성훈의 말에 답하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기 좀 하자."

“당신 그럴 때가 나는 제일 무섭더라.”

성훈이 예주의 눈치를 살피고는 등을 세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예주는 다이어리에서 영수증을 꺼내 성훈의 앞으로 내밀었다.

“자, 말해 봐. 빼놓지 말고.”

“이거… 아, 별 거 아냐.”

성훈이 검지로 엄지손톱을 후벼 팠다. 불안할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어제 퇴근할 즈음에 고등학교 동기한테 연락이 왔어. 십 년 만에 연락온 친구라."

성훈은 동기를 만나 막창집에서 소주 세 병을 마시고 호프로 갔다. 한 잔만 더, 더, 하며 마셔대던 동기가 노래방에 가자고 하더니 술이 부족했는지 캔 맥주를 거푸 마셨다. 동기는 노래를 부르다 마이크를 잡은 채 잠들어 버렸다. 두고 나올 수 없어 흔들어 깨웠더니 동기가 마이크에 대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결혼도 못했어. 토끼 같은 새끼도 없어. 친구도 없어. 사업은 들어먹었어. 나 도우미 좀 불러주라. 친구야 고성훈아.”

성훈은 노래방 도우미를 부른 뒤 동기가 도우미의 몸을 더듬는 것을 보고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그곳을 나왔다. 동기가 노래방 입구까지 달려와 성훈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고성훈, 딱 한 잔만 더 하고 가라, 응. 내가 너한테 이것밖에 안 되는 친구냐? 엉?”

동기는 양손에 성훈과 여자를 잡고 호텔로 가겠다고 떼를 썼다. 성훈은 노래방 근처 호텔 앞에서 도우미에게 몰래 팁을 준 뒤 택시를 잡아 탔다.

“택시를 탄 건 기억이 나는데... 그 뒤부터 필름이 끊겼어. 하지만 여자랑… 그러진 않았어. 나 알잖아. 정말이야.”

성훈은 소파 아래로 내려가 두 손을 포개어 무릎 위에 얹고 꿇어앉았다. 고개를 깊숙이 숙인 성훈을 보며 예주는 성훈의 상사가 노래방 도우미를 불러야만 논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그 자리에 성훈도 불려 나간 적이 두 번 있었다. 성훈은 주위 사람들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타입이었다.

“남자들은 도우미 없으면 못 노니? 게다가 돈이 이렇게나 많이 들어? 룸살롱이야?”

“아니, 룸살롱은 더 들지. 하여튼… 그러니까 동기가…”

“동기 이름이 뭔데?”

“당신은 본 적 없는 친구야. 앞으로도 볼 일 없을 거니까 말할 필요도 없어. 우리 결혼식 할 때 해외에 있어서 못 왔다고 어제 늦은 축하 인사를 하다가 그렇게 된 거야.”

“축하를 그딴 식으로 하니 그 사람은? 그것도 친구 돈으로?”

“실은 내가 예전에 그 친구에게 신세 진 적이 있었거든.”

“무슨 신세?”

“여러 가지. 당신 만나기 전의 일이야.”

예주는 성훈이 직장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예주가 해명을 요구하는 문제에는 어물어물 덮어버리려고 하는 성훈을 보면 답답했다.

-2023년 10월 2일 (31일 차)





3.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던 동기가 몸도 가누지 못한 채 울면서 하는 부탁을 외면할 수가 없더라고."

하는 일도 어려워졌다는 동기가 만취해 있는데 지갑을 열어 계산하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다음날 출근도 해야 하고, 서울 경계를 넘어 친구를 경기도까지 데려올 수도 없고, 게다가 여자랑 굳이 자게 해 달라 애걸을 하고.

예주는 아무 여자랑 자는 걸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성훈에게 화가 났지만, 일단은 남편은 아니었다니까 믿어보기로 했다. 성훈은 예주의 표정이 풀어진 걸 보자 다리를 펴고 앉더니 종아리와 무릎과 발가락을 주물렀다.

예주는 성훈이 어물쩍 넘어가려고 할 때마다 화가 났지만 이번에도 용서하기로 했다.

성훈은 자신이 큰돈을 썼기 때문인지, 안 써도 될 곳에 돈을 써서인지,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과음을 해서인지, 민재를 준비해서 보내는 당번을 안 지켜서인지, 예주에게 거짓말을 해서인지, 예지의 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신 내가 뭐 때문에 화난 건지 알겠어?”

“아니. 다 얘기했잖아. 아직도 화가 안 풀려?”

“어제 나한테 문자 보냈을 때 무슨 일로 늦는다고 했는지 기억나?”

“뭐라고 했더라. 음, 회사에서…….”

“회사 간부 조모상 간다고 했지. 동기 만난다고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어?”

“문상은 갔어. 갔는데, 연락이 왔더라고. 동기가 사실은 …… 준기였어.”

“준기? 그 홍준기?”

“응...”

“우리 전세 보증금 가지고 잠적한 인간?”

“다는 아니지. 천만 원. 그래서 말하지 못했어. 당신이나 나나 다 잊은 일인데 괜히 화를 돋울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다 잊었다고? 뭘 잊어? 그게 잊을 수 있는 일이야? 천만 원이 우스운 돈이냐고?”

홍준기라는 이름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동기들 사이에서 총각 딱지 떼 주는 전문으로 통했다. 성훈 역시 수능 백일주를 마시고 홍준기를 따라 기차역 근처에 가서 여자를 샀다고 했다.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예주는 더러워,라고 무심코 뱉었다. 성훈은 몹시 부끄러워했고 미안하다고 했다. 결혼식 하루 전날 밤이었다.

성훈이 스물여섯이었으니 설마 여자 경험이 없겠나 싶었지만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자신의 동정을 주었다는 고백에 예주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성훈을 그런 데로 이끈 사람이 친구를 등쳐먹고 도망을 갔으니 성훈은 물론이고 아내인 자기까지 급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가진 것 없이 태어났지만 살면서 갖게 되는 것들만큼은 불순하지 않기를 바랐던 예주였다.

“준기, 나쁜 애는 아니야. 저도 사정이 어려워서 그랬지,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어. 언젠가 꼭 갚겠다고 했어. 남자들 사이에서는 인정받는 친구이고 의리가 있어서…….”

“무슨 인정? 무슨 의리? 만난 적도 없으니 내 눈에 그 사람 보이게 하지 말아 줘. 내 귀에 어떤 이야기도 들리게 하지 말아 줘. 약속하면 오늘 일은 묻을게.”

성훈이 다 식은 녹차를 후루룩 마셨다. 씁쓸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입맛을 다셨다.




어제 <거룩한 글쓰기 시즌 8 - 2023년 10월 2일(31일 차)>를 서랍에 넣어둔 채 발행하는 걸 망설이다 밤 아홉 시부터 잠이 들었어요. 부분으로 쪼개서 올리려니까 대사글만 남발한 게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조금만 수정하자 손을 대다 보니 이번 주에 시간을 벌기 위해 예전 작품 올리기로 한 애초의 원칙이 또 와르르...
나는 왜 맨날 이렇게 즉흥적이고 충동적일까. 이건 다 극 P라 그래. 그런 핑계를 대고 싶네요.
며칠째 복통으로 잠을 잘 못 잤는데, 그제부터 심해져서 집중력이 몹시 떨어졌다는 핑계까지. 이사를 앞둔 스트레스 때문인지, 공저로 책을 출간하는 프로젝트 때문인지 사서 고생하는 저를 이 아침 토닥여 주고 싶네요.
연휴의 마지막 날이네요. 많이 많이 웃고 후회 없이 보내시기 바랍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과 따는 풍경-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