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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Dec 29. 2023

탈직 60일째

무얼 하며 살지, 암중모색




사회에 나온 뒤 나의 직업 정체성은 '강사' 아니면 '자영업자'였다.

지난 9월 27일에 공부방 마지막 수업, 10월 29일에 과외 마지막 수업을 한 뒤 10월 30일부터 나는 탈직, 무직 상태이다.

10월 초에 전입신고를 하러 행정복지센터에 갔다가 혹시나 하여 '사회복지과'에 문의하였다.

"며칠 전 폐업하고 이사 왔어요. 혹시 지원받을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유리벽 너머에 마스크를 쓰고 앉아 있던 사회복지 공무원 김*경 씨가 쪼르르 달려 나오더니 어떤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녀는 '안산시 긴급 지원비'와 '정부 긴급 지원비'가 있다고 알려주며 폐업 사유, 자산 등을 물었다.

글을 쓰려니 부끄럽지만(이 나이 되도록 너무 가진 게 없어서)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정보가 될지도 몰라 조건을 적어보자면 이랬다. 안산시 경우이다.

1. 본인 명의의 통장 자산을 모두 합하여 1,400만 원 이하.(청약 통장 금액은 열외)

2. 주소득자 또는 부소득자의 실직으로 소득을 상실하거나 급격히 감소한 경우.

3. 임대한 부동산의 가격이 1억 5천만 원 이하.

복지사는 세 가지 조건에 부합한다면 폐업신고서와 최근 3개월의 통장 내역 사본을 제출하라고 하였다. 안타깝게도, 아니 어쩌면 다행이게도 부합하였다. 기본 3개월 동안 지원비를 받을 수 있고 연장하면 6개월까지 매월 60만 원에서 80만 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단, 그동안엔 어떤 소득도 없어야 했다. 나는 백수 상태로 어떤 일을 하며 살지 탐색하려고 했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상상도 못한 지원을 받게 된 것이었다. 온라인으로 전입신고하려다, 노느니 직접 행정복지센터로 산책 나간 덕분에 잡은 기회였다.

2주 전에는 '국민 취업 지원 제도'를 신청하였다. 오늘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30년 동안 종사하던 학원업에서 탈직하리라 결심한 것은 올해 5월부터였다. 이혼할 때도 그랬듯 우리 친정 식구들은(걱정은 했겠지만) 큰 반대를 하는 이가 없었다. 아버지, 오빠와 올케, 동생네 부부가 모두 응원해 주었다.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만큼 누구 하나 잘 살지도 않지만, 서로를 곤경에 빠뜨린다거나 피해를 준다거나 하지 않으려는 우리 남매는 각자의 결정을 최대한 존중하는 편이다.

"그래. 좀 쉬어도 돼."(아버지)

"그동안 애썼다. 몇 달이라도 쉬는 것도 필요하지."(오빠)

"아가씨 진작 쉬었어야 해요. 마음 놓고 쉬어요."(올케)

"언니,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것도 좀 해 봐. 부럽다."(동생)

친구나 단체 회원들은 물론 강력히 응원다. 5월만 해도 전세 보증금 빼서 세계 여행하다가 어느 나라에서든 정착할지도 모르겠다고 허세를 부려서 정말로 박수를 받았다. 다들 저지르기 어려운 일을 누구라도 한다고 하니까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해외여행을 많이 다녀오고 가족이 국제파인 지인은 필리핀 어느 지역 한달살이가 월 30만 원이라며 강력 추천했다. 우리 사촌 언니가 일본 나가노에서 사는데 거기서 머물며 일본 여행을 할까도 계획하여 언니의 승낙도 받아두었다. 그러다가 제주도나 강원도 한달살이로 여행 목적지를 축소했다. 좀 더 현실적인 대안으로 이어지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아파트에서 2년을 살고 나면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지역으로 가 살아보겠다는 생각하고 있었으니, 여행 자체에 가진 돈을 다 쓰자고 했던 객기 같은 야망에서 실질적인 탐색전 차원의 여행으로 바꾼 이었다.

계획이 축소수정되는 사이에 마지막 과외 수업까지 마친 내게 만나는 이마다 물었다.

"언제 떠나? 어디로 떠나?"

나보다 더 신난 이들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창창이 하고 싶은 것 다 해'라고 했다.

해외 여행은커녕 국내 장기여행도 접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전 남편이 내년 말까지 매월 100만 원씩 내게 갚기로 한 돈을 믿고 탈직 결심을 어렵지 않게 했던 터였다. 덜 쓰며 살 거라고 야무지게 계획했던 나는 안산시 긴급 지원비까지 받게 되어 매월 160만 원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몇 달은 말이다. 모아둔 돈도 없고, 퇴직금도 없는 처지에 너무나 감사한 기회였다.

과외가 끝난 10월 말부터 12월까지 긴급지원비를 받았고, 오늘 연장 가능한지 문의했더니 소득이 없었다면 3개월 연장할 수 있다고 했다.

"네, 소득 없었습니다."

"3개월 통장 잔액 사본을 팩스로 보내주세요."

놀고, 쉬고, 자는 데 죄책감이 큰 나는 매일 뭐라도 하려고 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내게 친구가 오죽하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뒹굴거리며 쉬기'라는 미션을 주기도 하였지만, 나는 매일 할것을 찾았다.

10월엔 매주 서너 번씩 과외를 다녔고, 몇 번을 여성 단체 행사에 도우미로 나가기도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 병원 모시고 갈 일이 두 배 늘어 매주 서울에 다녀왔다. 11월엔 신춘문예 소설에 응모하기 위해 허리가 나갈 정도로 컴 앞에 죽치고 앉아 소설 초고 3편을 수정하였다. 백수인 나, 노는 나에 대한 자괴감을 뭐라도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나로 자위하며 12월 중순까지 보낸 셈이다.


12월 첫 주에는 전라남도 무안 고모댁에서 치러지는 아버지 남매분들의 송년회에 아버지를 모시고 갔다. 하필 신춘문예 응모 시기와 겹쳐 송년회를 한다고 하니 모처럼 먹은 도전의식을 사그러뜨려야 하나 어쩌나 했는데, 용기 내어 어른들께 양해를 구했더니 전남 자긍심이 크신 큰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설가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 씨가 장흥 아니냐. 무안에서도 네가 소설가로 등단해 보아라. 집안에 소설가 있으면 자랑스럽겄구나야."

친가 어른들은 쉰이 넘은 나이에 이혼하고 온 무직자 조카가 작가라는 꿈을 꾸겠다는 말에 허무맹랑하다고 나무랄만도 한데 도리어 한목소리로 응원해 주셨다. 그 덕에 하루 4~5시간은 면 소재지 카페에 가서 소설 수정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2박 3일 만에 어른들 송년회가 끝나고 다들 돌아가신 뒤에 고모가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일흔여섯 살인 고모는 양파와 마늘 농사지으며 혼자 사는 분이다.  

"먼 데서 한달살이하지 말고 여 와서 하면 어떠냐. 고모는 거의 나가 지내니까, 집이 다 너 것이여. 만고땡 아니냐. 산책도 하다 맘에 들면 한 일 년 살아 봐. 알바해도 되고 야."

나는 평생 동안 전남 쪽 친가 어른들과 열 번도 못 만났다. 그런데도 사람을 들이는 쉽지 않은 일을 가볍게 제안하시는 고모 덕에 생각도 못한 공간에서 한달살이가 실현되게 생겼다. 아, 나는 땡잡았다!


고모댁 근처 바닷가
고모댁 현관에서 세 걸음 나와 찍은 새벽 사진


요즘 나는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게다가 나를 무척 잘 따랐던 댕댕이 '미남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미남이시네요^^


소설 응모하느라 애쓴 나에게 주는 선물로 글쓰기 친구들을 포함하여 몇 그룹의 친구들과 이틀거리로 송년회를 치렀다. 눈치 볼 사람 없는 우리 집이 송년회 장소다. 나는 이제 검소, 소탈해지기로 했으므로 당당하게 제안한다.

"1인 1 요리를 가져와 함께 먹자. 두부 한 모나 버섯 한 꾸러미도 좋아. 1만 원 이하의 선물을 준비하여 흥겹고 감사한 연말 나눔을 하자."

2023년의 마지막 이틀을 남겨둔 지금, 조금 허하고 불안하고 두렵지만, 이 시간도 귀히 여기리라 다짐해 본다.

1월 6일, 무안으로 고고씽하기 전까지 냉장고의 상할 만한 식재료를 최대한 소비하며, 1월 중순부터 거룩한 글쓰기 시즌 9를 시작하기로 한 글벗들과 예열 차원에서 김애란의 단편 '달려라, 아비'를 필사하고 있다. 잘 지은 옷의 한 땀 한 땀을 면밀히 살피듯 막힌 데 없는 문장을 곱씹어 읽으며 하는 필사, 참 좋다.


아!

이번 소설 응모는 노느니 소설이나 쓰자 하고 도전했던 거라...

당선 소식은 당연히! 없었다.

"큰아버지, 집안의 자랑스러운 작가로 우뚝 서는 것은 내년이나 기약해 보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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