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쇠한 부모를 돌보는 일이 우리 남매에게도 중대사가 되었다. 6년 전 엄마가 간암 말기 진단을 받은 이후부터다. 엄마를 단 두 달 만에 하늘로 떠나보내고 나서 우리 남매가 아버지에게 정성을 다하게 된 건 엄마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으리라.
가장으로서 감정이입되어서일까. 오빠가 아버지를 가장 지극하고 성실하게 돌봐드렸다. 아버진 건강한 편이었다.지난 해 4월까지는.
작년 5월, 아버지의 폐에 물이 차 입원했다 퇴원한 이후, 아버지는 급격히 늙고 약해졌다. 간병인을 알아보니 우리 형편에 고용하기 어려웠다. 사회복지사인 친구의 조언 덕분에 데이케어센터를 알아보게 되었다.
일명 '노치원'이라 불리는 데이케어센터 종일반에입소하여점심, 저녁 두 끼 식사와 두 번의 간식을 잡숫게 되니 주간은 조금이나마 안심되었다.한 달에 90만 원 정도의비용이 들었는데, 위급 상황에 대비하려고 모으던 남매계 잔액이 확확 줄어들었다. 복지사인 친구가장애 등급을 신청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아버지가 지팡이에 의지해야 겨우 걷고 끼니를 챙겨드실 수 없는데도 장애 등급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 세 남매는 주말마다당번을 정해 아버지 끼니를 챙겨드리러 방문했다. 그런 지 반년이 지난가을의 어느날, 아버지가 위암 진단을 받아서 시술과 치료가 시작됐다. 폐 관련은 A 종합병원, 위 관련은 B 종합병원을 다니느라 주말 돌봄에 더하여주간의 병원행이 추가되었다. 오빠와 동생이 직장에 다니니, 일을 쉬고 있는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가는 게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거의 매주서울의 아버지 댁에 가서 자고 이튿날 아침 병원에 모시고 갔다가 센터에 내려드리고 안산으로 돌아오는 일정을 보내며,탈직 삼 개월이 흘렀다.
암이 조기 치료가 되어 병원 일정이 뜸해지려나 싶은 12월 중순, 생각도 못한 치과 진료가 더해졌다. 여느 아침처럼 아버지와 통화하다가끊기 직전, 아버지 발음이 어눌해 왜 그러시냐 물었더니 하는 말씀.
"요즘 국물을 먹으면 아래 틀니가 입안에서 둥둥 떠다녀. 지금도 이 닦다가 자꾸 빠져서 애먹었어."
"틀니가 둥둥 뜬다고요? 폴리덴트(접착제)로 안 붙이셨어요?"
"아랫니는 폴리덴트로 붙이는 게 아니야."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폴리덴트의 존재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는데 아랫니는 그것으로 부착하는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사용하셨단 말인가? 실은 아랫니가 틀니인 줄도 몰랐던 나는 아버지에게 어떤 상황인지 자세히 여쭈려 했지만, 아침 여덟 시 데이케어센터에서 오는 차를 타러 나갈 시간이라 우선 전화를 끊으며 말씀드렸다.
"이번 주말에 제가 가서 하루 더 잘 테니 월요일에 치과에 가요."
주말에 아버지 생신 겸 식구들이 모였을 때 아버지 틀니가 문제가 생겼다고 말을 꺼냈다. 아버지가 언제 아래 틀니를 했는지, 언제부터 문제가 심각했는지 아무도 몰랐다는 걸 그때 알았다.
"아버지 틀니 좀 잠깐 빼 보세요."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이대로 쓰다 죽어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가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니 마음이 상한 아버지가 머뭇거렸다. 순간 '아버지 옷 좀 벗어보세요' 하는 느낌이 드셨을 수도 있겠다 싶어 재촉하지 않았다.
한참만에 아버지가 틀니를 뺐는데 세 조각이나 되었다. 메인 하나에 두 개짜리, 하나짜리. 틀니 안에 남은 이는 죄 썩어서 형태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오빠와 올케, 나는찡그린 인상을숨기지 못했다. 너무나 참혹한 치아 상태 때문에. 저런치아 위에 세 종류의 틀니를 매일 끼우고 빼고를 반복하며 지냈다니. 아버지 신상을 세심하게 신경 써 오던 오빠마저 몰랐으니 나는 더군다나 할 말이 없었다.
"어느 치과 다니셨어요?"
"치과 아니야. 기공소야. 멀어."
"언제 하셨는데요?"
"십 년 넘았어. 네 엄마 틀니 했던 곳이야."
치과에서 한 것도 아니었다니. 돈이 없는 부모님은 치과에서 1차 진료를 받고 기공소에서 틀니를 맞춰 생활했던 것이다. 엄마 말을 잘 듣던 아버지였다.
우리는 집 가까운 곳에서 치과를 새로 찾아야 했다.
검색하니 틀니나 임플란트 중 택일하거나 두 개를 절충하는 방법 등 치과마다 치료법이 다양해 두세 군데 진단을 받은 뒤 결정하기로 했다. 아버지 댁 주변의 고등학교 때 친구들에게 연락해 잘하는 치과를 소개받았다. 나는 하루 더 자고 가기로 하였다.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다닐 생각을 하니 한숨이 나왔다.
이튿날 아침, 밤새 잠을 설친 나처럼 아버지도 잠을 못 주무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한, 두 번째 치과 의사의 솔루션은 이러했다.
"썩고 염증이 심한 치아를 네 개 빼고 두 개 남은 이를 살려서 기존 틀니를 수리하여 끼우고 생활하시다가 염증이 가라앉고 잇몸에 힘이 생기면 남은 두 개의 이를 기둥 삼아 임플란트를 하고, 틀니를 씌우는 게 좋겠습니다. 거기까지는 보험도 적용됩니다."
문제는 당일 썩은 이를 빼지 못한다고 했다. 항응고제를 처방한 병원을 찾아가 투약 정지와 발치 허가 소견서를 받아오라 했다. 지난한 치료 과정이 예상되었다. 답답했다.
결국 아버지 댁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게 됐다. 저녁에 센터에서 돌아온 아버지에게 공연히 짜증을 냈다. 평생 그렇게 지혜롭던 아버지가 대체 왜 저 지경이 되도록, 이가 다 무너지도록 두었을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그렇게 될 때까지 두셨어요. 집에도 못 가고 이게 뭐예요."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피로감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러다 아버지의 혼잣말 소리를 꿈처럼 듣고 깼다.
"에고,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나."
나는 못 들은 척하고 천장만 보며 누워 있었다. 두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본업을 때려치우고 아버지 돌봄에 투자하는 이 시간이 너무나 소모적으로 느껴지는 한편, 아버지를 돌봐드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니 감사하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짜증 낼 일이 아닌 건 분명했으므로 사과드렸다.
"아빠, 제가 어떤 일 하며 살아야 하나 탐색하리라 계획한 시간이 늦춰지니 마음이 조급해졌어요. 죄송해요. 그러니 아빠도 나쁜 생각하지 마시고 힘내 주세요. 저라도 옆에 있을 수 있으니 다행이잖아요."
"그래, 힘낼게. 아빠가 미안해서 그렇지. 쉰다고 일을 그만둔 넌데."
사흘째 밤이 고요히 흘렀다.
다음 날, 발치 허가를 승인 받기 위해 두 종합병원을 갔다. 예약 없어도 소견서는 줄 거라는 희망사항을 가지고 들른 A 병원에서그것은 여지없이 뭉개졌다. 시간 들여, 기름값 들여, 마음 들여,생고생만 했다.항응고제를 처방한 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허탈하게 나왔고, B 병원은 의사가 출근하지 않는 날이라 하였다. 결국 그날은 공쳤다.
늘 예약된 상태에서 다닌 덕에 우습게 보았던종합병원. 예약 없이 방문하면 큰 코를 다친다는 호된 가르침을받았다. 하필 올 겨울 최고의 강추위라는 날이었다. 뭐가 이렇게 어렵고 복잡하냐고 혼자 욕지거리를 뱉으며 내 머리를 쾅쾅 치며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서울을 가로질러 다닌 날이었다. 길은 밀리고 사고 위험도 몇 번, 주유도 새로 해야 했다.
B 병원에서 예약하고 돌아온 며칠 뒤 아침 출근길과 겹쳐 서울 중심부를 뚫고 밀려서 병원에 도착했다. 의사까지는 만나 뵈었는데, 이번엔 환자의 주민등록증을 제출해야만 소견서를 출력해 주겠다고 했다. 예약할 때 간호사가 말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실은 이 말을 들은 순간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났다. 복도로 나가 꽤 한참을 울었다. 뭔지 모르는 기분이었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냥 약이 바짝 올랐다.
종합병원 시스템에 적응하느라 겪은 고생들이 와르르 무너지듯 몰려왔다. 내가 할 수 없는, 돌봄&요양 전문가가 필요한 일 같았다. 남매들에게도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일처리를 한 번에 하지 못하고, 두세 번씩 실수하는 내 모습과 폐 관련 병원에서 항응고제 처방을 했으리라 생각한 나의 무지함마저.
게다가 기름값 들이는 걸 남매계에 청구하기도 너무 야박한 것 같고. 근데 나는 돈이 없으니 허세 부릴 때가 아니다. 소중한 며칠이 이렇게 날아가는구나. 여길 다시 와야 하고 치과에 다시 모시고 가야 하고... 이기심이 이성을 가렸다.
A 병원은 주민번호만 제출하면 되어서 폰에 저장하고 다녔는데... '환자 동의서'가 없어서 허탕 치던 11월의 어느 날이 생각났다.
"먼 데서 왔어요. 주민등록증 가지러 아버지 계신 곳까지 다녀오기 어려운데 어떻게 안 될까요..."
사정사정하여 주민등록증 사진을 제출하기로 하였다. 센터의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사진을 받았다.
그 뒤로도 연줄연줄 복잡한 일들이... 독자분들도 읽기 갑갑하리라. 그만하자.
그럼에도 위의 모든 것에서 배운 것은 분명히 있다. '돌봄'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되었고, 돌봄 대상에게 정성을 들이되 자기 생활과 분리하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그러하듯 효도라는 당위성이 아니라, 초보자 수준에서 '노인 돌봄'을 잘 수행할 방법을 터득해 나가는 길을 찾아가도록 하겠다. 난 효녀가 되려는 게 아니라 한 생명체가 자신의 생을 잘 마무리하는 과정을 돕기 시작한 것일 뿐이다.
오늘은 앞으로 어떤 글을, 어떤 주기로 쓰겠다는, 작년을 반성하고 새해를 기약하는 내용으로 글을 쓰리라 생각해 두었는데, 난데없이 아버지 돌봄에 대한 기나긴 글이 되고 말았네요.
독자님들, 아무쪼록 좋은 글책 깊이 읽고, 감동과 위로가 되는 글 많이쓰는 2024년을 이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