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내 벗들은 친구가 많은 창창이 늘 누군가와 함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다 보니 수학여행 가서 도리어 혼자 다닌 시간이 꽤 있었다. 단체 사진의 구석에 얼굴 반만 내민 열여덟의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고개가 갸웃거려지지만. 풍요 속의 빈곤이었을까? 아무튼 학창 시절엔 결정적일 때 내 옆에 누가 없었다는 결핍감이 남아있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인 시절이 좋았다. 그는 늘 나와 함께 있었으니까. 결정적인 날, 나를 혼자 둔 적이 없었으니까.(앗, 딱 한 번! 그것은 언젠가 쓸 이야기)
2021년 브런치에 입성하고 석 달쯤 지난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나는 혼자였다. 수학여행 때처럼 싱글들은 내가 선약을 만든 줄 알고 다른 누군가와 보내기로 했다 하고, 커플들은 당연하게도 가족과 함께라 했다.
왜 아무하고도 약속을 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는데, 혼자라서 외로웠던 나는, 저녁 수업을 마치고 누군가를 따라 한번 가 봤던 칵테일바에 택시를 타고 갔다. 넉살 좋은 마담과 이십 대 네 명과 합석하여 새벽 서너 시까지 놀았다.
집에 들어왔더니 그냥 잠을 잘 수가 없는 거다. 취중진담으로 글을 바람같이 쓰고는 발행을 꾹 눌렀다.(쫄보라서 발행을 못한 채, 서랍에 쌓아두는 글이 늘고 있을 때였다.) 잠이 까무룩 들었는데 댓글 알림이 떴다.
나의 첫 댓글러인 그 작가님이 '메리크리스마스'라는 인사와 짧은 위로와 격려의 문장을 남긴 것을 보았다. 믿지 않겠지만 눈물을 찔끔 흘렸다. 아무의 피드백도 없는 글을 주야장천 남기는 것은 정말이지 사막에서 생명체를 기다리는 기분을 무한정 느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며칠 뒤 그 글은 발행 취소했다. 감정이 흘러넘치는 게 부끄러워서.)
내 글에 처음으로 반응해 준 그 작가님이 너무 고마워서 절대 잊을 수 없던 그분은, 내가 좋아하는 면들을 다 갖춘 작가님이었다. 다채로운 관심과 지식, 섬세하고 아름답고 진솔한 문장, 꾸준하고 성실한 글 발행, 다른 작가님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관심과 위로의 태도까지.
이후에도 작가님은 독자도 없는 내 글집에 꾸준히 방문하며 애정 어린 걱정과 관심, 피드백을 남겨주었다.
그 해의 크리스마스 밤, 작가님의 위로 덕분에 나의 크리스마스는 새로운 추억으로 채워졌다. 내 마음속에만 간직할 거라 그분의 이름은 말하지 않겠다. 혹 작가님이 이 글을 본다면, 비밀스럽고 기쁜 마음을 느끼길 바라며...
지금은 그 작가님이 어떤 사정인지 활동을 하지 않는다. 작년 11월에 작가님이 남긴 마지막 글에 가서 나는 빈집을 둘러보는 마음으로 허전하게 머무르다 돌아오곤 한다.
"작가님, 메리크리스마스.
저에게 건넨 따스한 위로는 제가 다른 이들에게 따스해지도록 만드는 마법이었어요. 지금까지 브런치에 남아 있는 힘이 되었고요.
부디 작가님의 일상이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크리스마스이브, 싱글 파티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우리 아파트 작은 부엌에서 송년회를 하였다. 싱글 다섯 명이 모이기로 했는데, 소식을 들은 100일 글쓰기 글벗이자 이웃사촌인 동생이 합석했다.
자리는 비좁았지만, 한때 목수를 꿈꾼 조카가 만들어 준 육인용 식탁 덕분에 상차림은 화려하였다. 모두의 협력 덕분이었다.
작년에 학생들 덕분에 만들게 된 트리, 올해도 재사용
이혼한 뒤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싱글 20년 차 H, 하나뿐인 스물네 살 딸과 각자 독립적으로 살고 있는 6년 차 J, 위자료도 받지 못했지만 남매를 혼자 힘으로 당당하게 키워 대학생들을 만든 7년 차 Y, 유치원생과 초등학생 두 딸을 역시 위자료도 받지 않고 밝게 씩씩하게 양육하는 싱글맘 4년 차 K, 그리고 부양할 아무도 없는 가장 자유로운 싱글 3년 차인 나는 각자 음식 한두 가지씩 준비하여 모였다.
H의 꽃게탕, J의 어묵탕과 실 같은 오징어채 안주, 에어프라이에 구운 Y의 핫윙, K의 팥죽과 볶음쌀국수, 내가 준비한 오징어김치전과 두부김치가 한 자리에 모였다. 파튀 분위기를 한껏 고조할 만한 하이볼을 준비했더니 술을 잘 마시지 않는 친구들이 한두 잔씩 달게 마셨다. 이웃사촌이자 동생 N은 학교 학생들과 만들었다는 딸기케이크를 준비해 왔다. 덕분에 촛불 켜 놓고 이야기가 자연스레 이어졌다.
각자의 근황도 들려주고 강심장급 썰을 푼 우리 고모들 얘기를 나누며 깔깔거렸다.
돌아가며 올해 가장 기억나는 일이나 스스로 잘했다고 칭찬하고 싶은 일을 이야기했고, 내년에 꼭 이루고 싶은 일이나 기대되는 일도 들려주었다. 며칠 뒤 무안으로 한달살이를 떠나는 나부터 시작해내년 1월엔 각자 무슨 일로 건강한 2024년을 출발할지 공유하였다.
"우리가 12월 23일 밤에 아무도 말리는 사람 없이 이렇게 1박을 하는 건 다 싱글이기 때문이지."
"고모님들 말씀처럼 낙원을 알아부렀는디. 다시 결혼 생활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 것 같아."
"난 언제 할지 모르지만...(일동 웃음) 언니들 부럽다. 난 돌아가서 애와 아범과 자야 해."
엄마를 기다리는어린 자매들이 있는 K가 자정에 돌아갔고, 새벽 한 시에 이웃사촌 N이 눈을 밟으며 돌아갔다.
안방에서 세 명, 작은 방에서 한 명이 자고 다음 날, 오전에 헤어지기로 하였으나, 친구들은 내 책장을 정리해 준다고 한동안 씨름하더니 청소를 하고는 베란다에 날아든 새를 내보내느라 수선을 떨다가 무안에서 가져온 마늘을 까자고 하였다.
심심하니 드라마 <소년시대>를 틀어놓고 찌질이이자 영웅장병태를 응원하며 충청도 사투리의 구수한 맛에 농담을 이어가다가 하루를 더 자기로 하였다. 전철 타고 갈 친구들이었지만, 주저앉기로 하니 술을 더 마셔도 되겄다!(알코올 중독자 모임 아닌데...)
친구들이 가져온 음식이 아직 많이 남았고, 위스키 원액이 반도 더 남아서 하이볼을 각각 몇 잔씩 마시며 대학 때 추억 가지고 기억 싸움을 하기도 하고, 앞으로의 삶을 격려하기도 하며, 23일에서 24일을 느슨하게 즐기며 25일로 '함께' 넘어갔다.
시부모, 남편, 친척들 시선과 구속에서 벗어난 낙원의 삶을 맛본 우리들의 새로운 크리스마스 추억이 하나 더 쌓였다. 독립한 자녀들이 성탄절 축하 메시지 하나 보내지 않아도 우리끼리 즐거운 시간이었다.
사실 이 날 모인 이들은 내 고등학교 친구, 대학 친구, 전 직장 동료이자 20년지기 동생들이었다. 그런 존재들이 어떻게 한 자리에 모여 밥도 먹고 잠도 잘 수 있느냐? 바로 100일 글쓰기 덕분이었다.
사오 백일 동안 함께 쓴 친구들은 나보다 서로를 궁금해하고, 만나고 싶고, 애정하는 사이가 되었다. 오프라인으로 만난 사이들보다, 과거와 현재를 글로 나눈 내밀한 사이에서 찐친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빠서 시즌 8은 빠졌던 Y와 맨발걷기에 집중하느라 빠진 N도 시즌 9에는 들어온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