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일요일 저녁에 친구이자 동생인 노랑과 파랑을 만났다. 이십 년 전 두 친구는 미혼이었고 아이 엄마이던 나와 직장에서 동료로 만났다. 우리는 동료인 동시에 친한 친구가 되어서 자주 만나 밥 먹고 술 마시고 등산 가고 여행을 다녔다.
나중에는 우리 부부가 공동 창업하고 운영한 회사에서 수년 동안 함께 일했고, 지금은 우리 아들까지 그곳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할리우드 식이라 하나. 주황이라는 친구까지 나와 가깝던 다섯 사람이 일하는 그곳에 더 이상 가 보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고, X는 전 아내의 동료이자 친구들과 여전히 일하고 있다.
X와 나는 원수가 된 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나 때문에 퇴사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의 성향과 능력, 생계를 고려해 그곳에서 계속 일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내가 마지막 근무를 한 뒤 코로나가 극심해져서 이 주 동안 문을 닫았는데 그 이후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X가 의도한 건 아니었겠는데 나는 십여 명의 동료들에게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하고 나오게 되었다. 그러니 그 친구들과 만나면 X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게 고통스러웠다. 한동안 그들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1년 여가 지나자 남편을 잃었다고 친구까지 잃을 수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들의 이야기다. 우리는 각자 극혐하던 음식을 이십 년을 만나면서 서로에게 영향받아먹을 수 있게 되었고, 상대의 관계망에 들어간 덕에 혼자라면 만나지 않을 사람도 만나며 살았다. 어쩌면 생활의 대혼란, 의식의 대혼란을 겪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 마시던 사람이 커피 중독자가 되었고, 내향형이자 동굴형 인간인 친구가 등산과 여행을 다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집에서 밥, 차, 술을 함께하며 날이면 날마다 붙어 지냈으니 말이다. 무수히 싸웠고 몇 개월 혹은 몇 년 동안 소원한 때도 있었다가 다시 만났다. 그렇게 온 이십 년이다. 어느 때인가는 그 친구들과 연을 끊으라고 남편이 말한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나만 그 그룹에서 빠졌으니 삶은 참...
다시 며칠 전의 만남 이야기다.
밥을 먹자고 연락한 친구가 베트남 식당을 정했다. 그 친구는 똠얌 쌀국수, 다른 친구는 쇠고기곱창쌀국수, 나는 배가 고프지 않아 양이 적은 어린이쌀국수를 시켰다. 똠얌을 너무 좋아하는 친구는 마라탕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똠얌의 특이한 향이 내게는 너무 강한 것 같아. 몇 숟갈은 맛있게 먹을 수 있는데 한 그릇 다 먹기엔 좀. "
둘은 마라탕을 먹어보지 않았다며 "언니는 역시 입맛이 젊어." 하고 웃었다.
작년 봄에 처음 마라탕을 먹어본 이후 속이 허할 때마다 그것이 생각났다. 매주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 수업을 마치면 마라탕 집으로 가는 루틴이 생겼다. 주로 혼자 가서 먹고는 근처 건물의 코인노래방에서 혼자 노래를 불렀다고 하니 둘 다 깔깔댔다.
"창창 언니답다."
곱창쌀국수를 시킨 친구가 소주를 시키며 내게 맥주를 시킬 거냐 물었다. 나도 소주를 마시겠다고 하니 무척 놀란다. "언니가 소주를?" 우리는 반 병씩 나눠마셨다. 나는 소맥은 한두 잔 마셔도 소주를 못 마셨는데 그것을 기억하는 친구는 깜짝 놀라면서도 반색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상대로 좋아하게 되면 반가운 마음 있지 않은가.
각자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 이야기나 꺼내도 즐거운 식사 시간이었고, 밖에 나오니 바람이 차서 따끈한 차를 마시기로 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의 카페에 들어갔다. 익숙한 것을 늘 고르던 친구는 내가 요즘 아포가토 사랑에 빠졌다고 하자 "안 먹어봤는데 나도 그럼 아포가토 먹어볼 테야!" 하며 도전 의욕을 빛냈다. 따끈한 차가 아닌 차갑고 달콤 쌉싸름한 아포가토를 달게 떠먹으며 "안산 최고의 아포가토를 먹을 수 있는 카페가 있어." 하고 소개하니 다음에 가 보자며 눈을 반짝였다.
똠얌을 시킨 친구가 자신이 이혼하기 전후(이혼 6년 차)에 지옥 같았다고 한 시절의 이야기를 할 때는 우리는 함께 눈물 흘렸다. 지금은 아이들과의 일상이 평온하고 감사하다는 그녀. 우리는 이제 서로를 응원하고 축복하는 동병상련의 사이다. 그녀는 두 아이를 유치원, 초등학교에 보낸 아침마다 나한테 안부 전화를 해 왔다. 내가 이혼한 3년 동안 거의 매일. 그녀의 일상이 앞으로도 안녕하게 이어지기를 소망하며 십일월의 일요일 밤이 저물어가는 시간에 우리는 함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