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라이오니>를 읽고

<<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한겨레출판)에 수록된 작품

by 창창한 날들


최후의 순간에 함께하는 사람



판타지맹盲


나는 판타지 읽기를 어려워한다. 소설이든 영화든, 판타지 해석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런 내가 글벗의 부탁(혹은 제안)으로 SF 단편소설 <최후의 라이오니>를 읽게 되었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에 수록된 작품이다.


글벗은 며칠 전 위 작품을 읽고 리뷰를 써서 합평받았는데, 평소 간결한 문체를 자랑하는 그녀가 쓴 뷰인데 읽기 어려웠다. 러니 공감도 되지 않았다.

가뜩이나 복잡하고 어려운 미래 세계와 사건을 자세하게 적으려다 보니 자신의 생각이 드러날 공간을 빼앗기고, 독자에게 공감할 여유를 줄 수 없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며칠 뒤, 글쓰기에 진심인 그녀가 리뷰를 수정했으니 다시 읽어봐 달라 부탁 전화를 했다.

"창창, 꼭 읽어봐 줘. 정말 굉장한 작품이고, 내가 하고픈 말이 가득한데, 표현하기가 너무 힘들어. 넌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리뷰를 쓸지 궁금하다."

"그녀가 라이오니에게 잡아먹힌 것 같은데. 나도 잡아먹힐 것 같고."

말은 그랬지만 그녀에 대한 애정과, 요즘 시간이 넘치게 많아 너그러워진 나는 기꺼이 수락했다.


무안 도서관으로 달려가 책을 찾았더니 다행히 있었다.

그녀의 리뷰에서 생경한 어휘를 많이 보았으니 미리 노트를 준비해서 읽기 시작.

광학 신호 입력기, 배양수조, 불멸인, 복제인간, 거주구 탐사, 3420ED.

이 작품 안의 인간들은 복제인간 혹은 불멸인의 모습으로 영원을 사는 존재이다.




결함은 축복일까 재앙일까


소설 속 주인공에게는 반드시 숨겨진 결함이 있기 마련이다. 그는 다른 인물들과 갈등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결함을 해소하고 극복한다. 독자는 결함이 주인공을 성장케 하는 과정을 보며 간접적으로 성장한다.

<최후의 라이오니>에서 라이오니 역시 '결함이 있는 복제인간'으로 등장한다. 라이오니의 결함은 다른 복제인간들과 달리 '걱정과 두려움을 많이 느끼는' 존재로 나고 자랐다는 것이다. 라이오니는 다른 복제인간과 너무나 다른 자신에 대해 늘 회의한다.


라이오니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미션에 홀로 나선다. 하지만 그녀는 탐색과정에서 기계인간 세계의 주체인 '셀'과 하위 기계들에 의해 감금당한다. 그들은 라이오니가 자신들을 구원할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에 감금해 놓고 구원의 시기를 기다리기로 했던 것이다.

라이오니는 자신을 그러한 존재로 보는 게 기이하고 궁금해서 그들에게 묻는다.


그리고 어쩌고 저쩌고...(묘사된 세계가 어려워서 생략함)


작품의 절반을 넘어서도록 아, 이런 세계는 너무 어려워, 어려워하며 나는 몇 번이나 책을 덮었다 열었다 하였다.

바람을 쐬러 나가 먼 들판을 보며 커피를 홀짝거렸다. 문득 깨닫는다. 이건 결코 풀지 못할 문제가 아니잖아!

모든 판타지 세계가 현실의 문제를 간접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한 매개이자 도구인 거니까.

그렇다면 김초엽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 이런 세계를 구축한 걸까.

다시 인내심을 가지고 두세 장 되돌아가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아래 문장을 만난다. 닷없이 이성의 끈이 무너진다.




최후의 순간에 함께하는 사람


라이오니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라이오니는 우리(하위기계들)의 두려움에 공감하는 유일한 복제였죠.
기계들에게도 소멸의 공포가 있다는 것을, 다른 복제들은 이해하지 못했지요.
<최후의 라이오니> p. 43



라이오니는 '셀'과 하위 기계들이 들려주는 수백 년의 기다림을 듣고 그들에게 점점 동화된다. 그것은 라이오니가 두려움에 공감할 줄 아는 복제 인간이었기에 가능했다. 두려움은 다른 인간 특히 약자를 돕고 사랑하게 만든다.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려면 고통의 한 올이라도 느껴본 자여야 하는데, 라이오니야말로 동족들로부터 '다르다'는 시선을 받으며 고통을 경험한 자였다.

라이오니는 그들이 기다려온 전설의 '진짜 라이오니'는 아니었지만, 셀의 절대적인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로 한다. 거짓 라이오니가 되어서라도 그들의 곁에 남기로 결정한다.


세계가 무너지는 그 순간까지 셀이 '라이오니'라는 구원자를 기다릴 수 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믿음' 때문이었다. 맹목적인 믿음으로 세팅된 존재였다 하더라도, 셀의 믿음이 숭고하게 느껴졌다.


죽어가는 셀의 곁에서 라이오니는 셀의 손을 잡는다. 둘은 멸망을 맞이하고 있지만 불행하지 않다.
<최후의 라이오니> p. 54




*김초엽

1993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포스텍 대학원 생화학 석사, 포스텍 화학과 전공.

2017년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 및 가작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방금 떠나온 세계』, 『행성어 서점』,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 중편소설 『므레모사』, 논픽션 『사이보그가 되다』(공저), 에세이 『책과 우연들』 등이 있다.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 오늘의 작가상, 젊은작가상,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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