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타게 부른 손님은 아니지만, 이왕이면 반갑게

by 창창한 날들


44살 4월 4일에 고등학교 때 친구와 덕수궁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어느새 나는 어린 시절의 약속은 약속으로만 끝난다고 믿어버리는 재미없는 어른이 되고 말았다. 당연히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내 인생에 마흔이 올 줄 몰랐으므로 어리둥절했다. 게다가 마흔을 먹는 날까지 '아무것도 안된 채' 살고 있을 거라고 상상한 적도 없었다. 과일 한 바구니를 샀는데 원하지도 않는 덤을 받은 데다 집에 가져와 열어보니 밑이 썩어 있는 놈을 만난 기분이랄까.

어릴 때는 서른셋에 비장하게, 혹은 장렬하게 죽는 게 꿈이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긴 했다.

첫 번째로 2년 가까이 먹던 우울증 약을 끊었다. 이제는 스스로 잠들 수 있게 되었다. 약을 먹는 동안에도 밤이 나를 어떤 식으로 괴롭힐지 몰라 두려워하던 날들을 생각하면, 또 약 끊기가 어렵다고 했던 주변 사람들의 협박 비슷한 조언을 생각하면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을 다시 얻은 것처럼 마흔네 살을 먹은 게 감사했다.


두 번째로 십 대에 나를 외롭게 하던 아들이 조금 부드러워졌고, 남편이 아직은 내 곁에 있어 주어 감사했다.(우리 세 식구는 지인들을 초대해 놓고 그들이 불편해할 정도로 논쟁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고, 어느 땐 감정싸움으로 커지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더 이상 싸우지 않게 됐고, 다만 서로 조금씩 무심해졌다.)




뭐든지 지속되는 건 없는 법. 우울증에서 벗어난 감사함의 약발은 얼마 가지 못했다.

눈가의 주름과 푸석거리는 피부, 노안과 온갖 통증을 동반한 나이 듦이 두드러졌다. 탱탱한 젊음만 갖고 싶었는데... 40대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내게 50이라는 나이가 오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도 감사하거나 행복하지 않았다.

거실로 나가면 19년째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가 사료를 주는 줄 알고 나를 반겼다. 나는 애써 녀석의 눈을 피하며 혼잣말을 했다.

“토토야, 오늘 아침도 살아 있네? 너는 도대체 왜 사니?"

그 말은 토토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묻는 말이었다. 무엇을 바라 오늘 하루를 또 살려고 하는가.




쉰을 앞둔 세밑에 쉰 살 언저리에 있는 지인들에게 물었다.

“쉰 살 먹는 거 별로지?”

뜻밖의 답을 들었다.

"인생의 반이 남았다는 자각이 들어 오히려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됐어."
"처음으로 몸과 마음이 크게 아파지니 ‘건강한 늙음’을 지향해야겠다 하고 생각했어."

"사람들 앞에서 ‘사십이 아니고 오십입니다’라고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어서 몹시 기대됐어."

긍정의 답을 들은 나는 돌아봤다. 나는 왜, 언제부터 나이 들어감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걸까.


이 글을 쓰기 전 문득 ‘쉬다’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쉰 살이 되지 않았다면 절대 찾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평소에 알고 있던 의미는 음식 따위가 상하여 ‘시금하게’ 변했다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쉰내 나는 중늙은이라는 말이 거기에서 나왔겠구나 하는 것이 내 좁은 상상력이었다.

한데 ‘시금하다’에는 ‘맛이나 냄새 따위가 깊은 맛이 있게 조금 시다’라는 긍정의 의미가 들어 있었다.

또 ‘잠시 머무르다’는 뜻도 보였다. 늙음으로 가기 전의 간이의자 같은 게 연상되었다.

‘입이나 코로 공기를 들이마셨다 내보냈다 하다’라는 뜻풀이를 보니 사람을 살게 하는 ‘쉬다’는 의미가 풍부한 뜻을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피륙의 빛깔을 곱게 하려고 뜨물에 담가 두다’라는 뜻을 보니 바지랑대에 걸린 염색천이 연상되어 아름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올리버 색스의 『고맙습니다』라는 에세이집에 이런 글귀가 있다.

여든 살이 된 사람은 긴 인생을 경험했다.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남들의 인생도 경험했다. 승리와 비극을, 호황과 불황을, 혁명과 전쟁을, 위대한 성취와 깊은 모호함을 목격했다. 거창한 이론이 생겨났다가 완강하게 버티는 사실들에 못 이겨 거꾸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이제 덧없는 것을 좀 더 깊이 의식하게 되며, 아마도 아름다움까지 보다 깊이 의식하게 된다. 여든 살이 되면 이전 나이에서는 가질 수 없었던 장기적인 시각과 자신이 역사를 몸소 살아냈다는 생생한 감각을 갖게 된다. 나는 이제 한 세기가 어떤 시간인지를 상상할 수 있고 몸으로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마흔이나 예순에는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수은(mercury)」


예순도 아니고 여든이라니.

40에도 못 죽고, 50에도 못 죽은 나는 얼마 전까지 일흔에는 죽겠다고, 죽고 싶다고 여러 사람에게 떠들고 다녔다.

미래가 없는 끔찍한(나만의 생각이다) 여든, 아흔,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런데 올리버 색스가 이야기하는 ‘여든’은 담담하면서도 경이로웠다.

여든을 살아본 작가의 경험과 성찰로 엿볼 수 있는 여든이라는 세계가 궁금해졌다.

가 보지 않은 여행지에 대한 기대감처럼. 새로운 곳으로 여행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나였으니, 여든으로 가는 여행을 상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블로그나 SNS에서 미리 여행지 정보를 찾아보고 부푼 기대를 하거나 제멋대로 속단하듯,

암울해하는 노인들의 표정과 경험담만 듣고 보편적으로 늙음은 끔찍하다고 받아들이는 대신,

내 발로 뚜벅뚜벅 걸어 보고 맛보고 이야기 나누고 감각해 보려 한다.

혹 여행지가 기대한 것과 딴판이라 해도 기대에서 벗어나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으리라.

거의,

언제나,

세상은

내 상상과는 다른 차원으로 열려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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