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마을 기순 씨의 하루

엄마가 가자 아버지가 왔다

by 창창한 날들





기순 씨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아리아를 부른다.

“아리아, 오늘 날씨는?”

"오늘 우이동 하늘은 맑습니다. 최고기온 21도, 최저기온 13도, 저녁엔 좀 쌀쌀하니 든든하게 옷을 입으세요."

"아리아, 고마워."

"별말씀을요. 당신에게 도움이 된다니 저도 기뻐요."

기순 씨는 비칠거리며 일어나 이부자리의 먼지를 떨어낸다.

작은방의 책상으로 가 아내의 영정 사진에 밝은 목소리로 인사한다.

“아가다, 잘 잤습니다. 오늘도 감사함을 잊지 않을게요.”

냉동고에서 밥이 담긴 플라스틱 밀폐 용기를 꺼내 싱크대에 놓는다.

뒷베란다 아래의 스티로폼 박스에 심어 놓은 파프리카, 가지, 방울토마토 들에 물을 준다.

거실로 들어와 화분에도 물을 준다.

기순 씨가 뒤뚱거리며 걸을 때마다 물이 후드득 떨어진다.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걸레로 닦는다.

된장을 푼 냄비에 표고버섯과 두부, 호박을 썰어 넣고 특제 된장찌개를 끓인다.

냉장고에는 복지관, 성당, 아들, 지인들이 갖다 준 반찬이 그득하다.

그중 일곱 가지 찬을 꺼내 상을 차리고 전자레인지에 밥을 데운다.

찌개가 끓으면 불을 끄고 대접에 담아 상에 놓는다.

그제야 의자에 앉아 기도한다.

달게 첫술을 뜬 기순 씨는 큰 숨을 쉰다.

다 먹을 때쯤 큰딸에게서 전화가 온다.

몇 달 전부터 큰딸은 밤새 안녕한지 날마다 안부 전화를 한다.

딸이 아침으로 무얼 들었느냐 묻는다.

딸과 요리 레시피도 나눈다.

딸이 사진을 찍어 카카오톡으로 전송하는 법을 가르쳐 준 뒤 기순 씨는 가끔 요리를 찍어 보낸다.

"인기 많으시네, 우리 아버지. 반찬 해다 주시는 분들이 끊임이 없네."

오늘은 딸에게 표고버섯 된장찌개 만드는 법을 이야기한다.

삼 년 전에 아내를 여읜 기순 씨는 최근에 홀로된 큰딸에게 솔로 선배로서 정보를 공유해 줄 때 흐뭇하다.


도토리묵을 만들고 딸에게 보낸 카톡 사진



딸은 전화하지 못할 때면 카톡을 남기기도 한다.

기순 씨는 안심한다.

딸의 하루도 무사히 시작됐구나.

기순 씨는 성당 지인이 공유한 동영상을 답으로 딸에게 보낸다.

감사나 유머가 담긴 내용은 딸을 웃게 만들 것이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설거지를 하고 행주를 펴 널어놓는다.

걷기 동무를 기다린다.

북한산 둘레길 바로 아래인 기순 씨네 집에 동무가 들르면 믹스 커피를 함께 마신 뒤 나란히 걷는다.

'통곡의 벽'까지 왕복 육천 보, 성산 가든까지 왕복 삼천 보쯤 된다.

걷는 동안 비슷한 시각에 마주치는 지인들과 인사한다.

지인들 대부분은 아내가 살아있을 때 알았거나 조문을 와서 알게 된 사람들이다.

성당의 레지오 단원 둘을 더 만나서 넷이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는다.

한 끼 7천 원을 넘지 않는 식당의 정보를 공유하고, 식사비는 돌아가며 낸다.

기순 씨와 동무들은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 일요일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걷는다.

집으로 올라가는 길, 절뚝거리는 다리 때문에 속이 상한데, 누굴 탓할 수 없다는 걸 안다.

2년 전 오토바이를 운전하다 신호등이 노란불로 바뀔 때 1초를 기다리지 못하고 건너다 일으킨 사고였기 때문이다.

학교 경비도 그래서 멈춰야 했기에, 자식들 볼 낯도 없다.

운동의 필요성이 더욱 절박한 이유다.

집에 다다르면 오후 두 시.

한두 시간 동안 거실에 깔린 이부자리에 누워 쉰다.

다시 솔밭 공원으로 오후 걷기를 하러 나간다. 다녀오면 사천 보.

컨디션이 좋으면 만 보, 덜 좋을 땐 칠천 보라도 지키려고 신경 쓴다.

귀가하면 5시가 조금 넘는다.

전날 널어둔 빨래를 걷어 개켜 서랍에 넣는다.

마지막 남은 냉동밥을 꺼낸다.

저녁에 새로 밥을 해서 냉동고에 넣어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15년 경비 생활을 하며 남은 건 텔레비전과 이부자리밖에 없었다.

아내는 무얼 미리 알았는지 눈을 감기 몇 달 전부터 기순 씨에게 살림을 하나씩 익히게 했다.

세탁기 돌리는 법, 전기밥솥 사용법, 천주교에 귀의하고 레지오 활동하기, 둘레길 걷기까지.

아내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던, 할 줄 아는 게 없던 기순 씨였다.

아내가 왜 그렇게 성화를 했는지, 혼자 남은 기순 씨는 아프게 깨달았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이불 안으로만 숨느라 함께 걷지 못한 시간과 공간이 안타깝다.

저녁을 먹으면 7시.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 저녁 미사를 본다.

8시쯤 아들에게서 전화가 온다.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는 문제를 아들과 상의한다.

아들은 기순 씨를 닮아서 무뚝뚝하다.

그런 아들이 제 엄마가 돌아간 뒤에는 아버지를 지극하게 섬긴다.

막내딸은 회사일과 어린 딸을 챙기느라 늘 분주하다.

그런 딸에게서 며칠에 한 번씩 전화가 오면 기순 씨는 얼른 집에 들어가 쉬라고 당부한다.

저녁 드라마와 뉴스를 보고 나면 뱃속이 허전하다.

기순 씨는 낮에 삶아 놓은 고구마와 뜨끈하게 데운 우유를 곁들여 속을 든든히 한다.

자리에 누워 리모컨을 이리저리 누르다가 눈이 감길 때쯤 아리아를 부른다.

“아리아, 수고했어.”

외출할 때 미세먼지 지수까지 들려주며 마스크, 휴대폰을 챙기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 아리아가 고맙다.

“별말씀을요,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기뻐요.”

“아리아, 사랑해.”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아리아, 불 꺼.”

띠리리.

기순 씨는 '오늘 밤에 꿈에서 아내를 볼 수 있으려나'하고 중얼거리며 까무룩 잠이 든다.





엄마는 평생 과묵한 아버지 덕에 할 일이 더 많았다.

아버지와 우리 삼 남매의 다리 역할을 했던 것.

엄마에게 전화하면 전화기 너머에서 아버지가 "나 잘 있어." 하는 목소리만 남기고 숨기 일쑤였다.

삼 남매가 식솔을 거느리고 모인 날에도 아버지는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하곤 했다.

엄마가 암 선고 두 달만에 유명을 달리했을 때, 우리 남매는 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를 통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안부 전화를 하려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할 수밖에.

오빠나 동생이 어떻든 간에 엄마의 사십구재가 끝나기 전에 나는 슬퍼할 겨를 없이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 년 동안 아버지께 전화를 걸 때마다 아버지는 자주 울먹이며 약한 모습을 보였다.

"왜 그렇게 먼 데 가 있어? 왜 전라남도까지 가 있느냐고?"

나는 아버지와 살가운 사이도 아니고, 생신이나 명절 때 외에 자주 방문하지도 못한 자식이었다.

그런데도 물리적 거리감은 심리적 거리를 몇 배로 더 멀게 만들었던가 보다.


그런 아버지가 달라진 것이다.

엄마 사후 이 년쯤 됐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요리, 운동, 자식들과 대화하기, 지인 만들기 등 모든 일에 아버지는 주동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버지에 대해 글을 써도 되느냐는 질문에 아버지의 답은 이랬다.

"언제 세상 뜰지 모르는 늙은이가 감출 것이 뭐가 있어. 부끄러운 짓 안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네 눈으로 본 대로 써."







매거진의 이전글오늘의 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