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순은 대머리였다.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속일 수 없는 유전자였다.
평생 가장 잘한 일이 미용을 배운 것이었다고 생각했다면, 가발을 손수 만들어 쓸 수 있어서였다.
미용사의 머리는 최적의 홍보수단인데, 그마저 물려받지 못한 금순은 빠지는 머리카락을 버려야 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안타까웠다.
늦은 밤 일이 끝나면 가발을 벗어 미용실 테이블 구석의 마네킹 두상에 씌워 놓았다.
종일 숨을 쉬지도 못하고 바람을 쐬지도 못한 두피에 부채 바람을 일으키면 그렇게 시원할 수 없었다.
냉장고에서 꺼낸 고추장과 풋고추를 안주 삼아 진로 소주를 따랐다.
잔째 입안으로 털어 넣은 다음 하루의 피로감을 몰아 숨을 내쉬었다.
윗도리를 벗은 금순은 나달나달한 러닝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남편과 아들의 것이었다.
큰딸은 그런 금순에게 낡은 속옷을, 그것도 남자들 것을 왜 입느냐고 성화를 했고, 금순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멀쩡한 걸 왜 버려, 옘병. 돈이 땅에서 솟아 하늘에서 떨어져.”
금순은 열셋에 보조원부터 시작해 예순 넘어 다리를 깁스한 바람에 영영 미용실 문을 닫게 됐다.
독한 파마약은 금순의 지문을 지워 놓았다. 불에 덴 것처럼 시뻘게진 손은 차갑고 뜨겁다는 감각마저 잃어버렸다.
금순은 쉰 살에 당뇨 진단을 받았다.
평생 보약 한 재 먹은 적 없고 사십 년 동안 꼬박 서서 가위를 잡았던 그녀를 버티게 해 준 것은 밥이었다.
김치 한 장 얹어서 입에 넣으면 꿀보다 달았다. 손님이 많을 때는 선 채로 5분 만에 뚝딱 고봉밥을 털어 넣었다. 위장에 탈도 나지 않아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였다.
의사는 당뇨를 관리하기 위해 금순에게 밥을 줄이라 했다. 금순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밥, 소주, 담배는 금순을 헤어나지 못하는 가난의 수레바퀴에서 강단 있게 버티게 해 준 최고의 친구였다.
나이 서른, 첫아들이 태중에 있을 때 입덧이 심해 피우기 시작한 담배는 평생 금순의 벗이었다.
훗날 금순은 큰딸에게 그 세 가지를 끊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노라 고백했다.
한때 술과 담배를 끊은 적이 있긴 했다.
금순의 남편이 반풍을 맞아 잘 못 움직이고 말도 어눌할 때였다.
의사는 남편에게 술, 담배를 모두 끊어야 산다고 경고했다.
십 평대의 좁은 집에서 함께 술 마시고 담배 태우던 남편을 외면하고 금순만 즐길 수는 없었다. 아니, 그것들로 버티는 힘을 삼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재떨이도 치우고, 소주도 사 들이지 않았다.
다행히 남편의 건강이 온전하게 돌아왔을 때 금순은 다시 소주와 담배를 시작했다.
금순은 하체가 빈약했다. 당뇨 때문이었는데 그때는 원인을 알지 못했다. 다만 종일 서서 일하며 운동할 여력이 없으니 근육이 빠지는 것뿐이라고, 세월이 흐르면서는 늙어서 그런 거라고 여겼다.
가늘어진 허벅지에 바지를 입으면 옷의 모양새가 나지 않았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의자나 가구에 살짝만 부딪혀도 무릎과 정강이가 멍투성이였다. 쉽게 생겼고 사라지는 데는 오래 걸렸다. 합병증 때문이었다.
예순이 넘어 뉴스에서 인슐린 펌프를 보게 됐다.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의 어머니가 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그것을 자녀들이 삼백 만원을 모아 해 주었다.
덕분에 금순은 양껏 밥을 먹고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그러나 대가는 치러야 했다. 금순 자신이 아침마다 바늘로 배를 찔러야 했고, 배꼽 주위는 두 손바닥만 한 넓이로 바늘을 찔러댄 뻘건 구멍들과 멍 자국이 촘촘했다. 몇 군데 살이 덧나기도 했다. 그러면 가려움으로 벅벅 긁어 상처투성이가 됐다.
그래도 자식들이 비싼 돈 들여 구입해 준 것이고, 밥과 술을 절제하지 않아도 되니 다 견딜 수 있었다.
금순은 천성이 밝았다.
섬세하게 가위질을 하면서도 손님과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기다리는 손님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배꼽 잡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머리를 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으러 오는 동네 여자들도 많았다. 여자들은 파마 기계도 씻어주고, 반찬도 갖다 주면서 미용실을 마실 삼아 죽치고 앉기 일쑤였다.
금순은 중년에 춤을 배운 적이 있었다. 중동에 남편을 보내고 춤바람이 난 동네 여자들이 미용실에 왔는데, 그때 배운 것이었다.
큰딸은 지르박을 배우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엄마가 혹시나 도망이라도 갈까 봐 겁났다.
다행히 금순은 딸이 걱정할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
금순은 콧노래를 자주 불렀고, 흥이 나면 손님들에게 노래를 들려주었다.
주위에선 이미자 목소리와 닮았다고도 했다.
금순의 애창곡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녀의 남편은 '황포돛대'라 하고 큰딸은 '섬마을 선생님'이라 하는데 두 사람의 증언 중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가 없다.
동네 사람들과 관광버스를 대절해 나들이를 가면 금순이 마이크를 잡고 버스에 탄 이들의 흥을 돋우었다. 금순이 타지 않은 관광버스는 앙꼬 빠진 찐빵이라고들 했다.
여기까지 나의 엄마를 묘사해 보았다.
며칠 전 줌으로 글쓰고 나누는 모임에서 '당신의 어머니를 묘사하라'는 시제로 쓰게 됐다.
엄마는 2017년에 세상을 떠났다.
벌써 5년.
가끔 생각한다. 내가 이혼한다면 엄마는 뭐라고 했을까.
X가 내 엄마, 아버지와 만나던 첫날이 아직도 선명하다.
X는 그날부터 우리 부모님을 존경한다고 했다.
엄마를 '여장부'라고 부른 것은 X였다.
엄마도 맏사위를 참 예뻐했다.
지금, 엄마가 보고 싶은 건지, X가 보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