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창을 살려준 외할머니

창창의 목숨은 여러 사람에게 빚졌다

by 창창한 날들

그림 <밤의 숲에서>(임효영 글, 그림)에서




외할머니는 슬하에 사녀일남을 두었으나 피란 때 한강 다리에서 외동아들을 잃었다. 후에 결혼을 앞둔 셋째 딸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은 한국전쟁 때 사라져 수십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으니 평생 심신이 잘려나가는 아픔을 겪으며 살았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어린 세 딸과 할머니는 각자 할 수 있는 일로 서로를 도우며 폐허가 된 서울의 한구석에서 자리를 잡아나갔다.


할머니는 세 딸을 차례대로 결혼시킨 뒤 막내딸이 결혼하고 나자 세 손주들을 봐 주느라 주로 거기에서 머물렀다. 그러다 바람 쐴 겸 큰딸과 둘째 딸이 사는 창골에 며칠씩 다녀가곤 했다.

큰이모네가 본채인 주인집, 둘째 딸네인 우리 집었는데 본채 뒤편에 무허가로 지은 임시 가옥이었다. 할머니는 밤에는 큰이모네 건넌방에서 자고 낮에는 우리집에서 지냈다.

어느 날 할머니가 세 살배기 어린 나를 안고 말했다.

“아이고 우리 이쁜 강아지한테서 어째 이래 냄새가 독하게 나냐.”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래요? 어젯밤에도 뽀득뽀득 씻겨 재웠는데요.”

엄마는 아이들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다고 꾸중하는 말로 들었다.

오빠가 다섯 살, 내가 세 살, 두 아이 건사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아침부터 밤까지 미용하느라 다리가 퉁퉁 부은 엄마는 아이 얼굴에 킁킁대는 외할머니에게 서운했다.

할머니는 냄새가 나는 곳을 찾으려고 내 얼굴 곳곳을 훑으며 큼큼거렸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는데, 두 달 넘게 밤마다 창창은 울어대고, 통 잠을 못 자니 저도 덩달아 혼이 빠져나가요. 배는 자꾸 뭉치고... 다 그만두고 싶어요.”

“에구, 그 무신 소리야. 아무리 힘들어도 그런 숭헌 소리는 하는 거 아니다. 배 속에 아기 들을까 무섭다. 우리 강아지가 제 동생 보느라 애쓰나 보다.”

할머니는 미심쩍은지 고개를 갸웃하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코에서 나는 것 같은데… 이게 당최 무슨 냄새야. 고린내야, 시궁창내야.”

임신부였던 엄마는 콧물 냄새가 다 그렇지 않으냐 대꾸하면서도 냄새가 심하긴 하다고 생각했다.

그즈음 엄마는 날 밝으면 머리를 시작해 늦은 밤까지 종일 서서 일하느라 몸이 쪼개질 것만 같은데, 어린 딸이 잘 놀다가도 찡찡거리며 울고 밤에는 잠을 못 자게 하니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다.

다음날 할머니는 바쁜 엄마 대신 고개 너머 병원으로 나를 업고 갔다. 병원에서는 웬 노파가 '아이 얼굴에서 냄새가 나요' 하는 말에 달리 검사할 방법이 없어, 아이를 엎었다 바로 누였다 한 뒤 배를 눌러보고 청진기를 대 보고 이상이 없다며 돌려보냈다.

할머니는 "애가 아파 놀지도, 자지도 못하고 우는데 멀쩡하다니, 대학교 나온 선생님들도 모르는 것이 있는가 보네" 하면서도 더 묻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날 밤도 칭얼대다 자지러지게 울다 잠을 못 이루는 내 옆에서 할머니는 토닥이며 밤을 새웠다. 아침 댓바람에 엄마와 외할머니 두 모녀는 아이를 둘러업고 고개를 넘어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도심의 이비인후과엘 찾아갔다.

의사가 버둥거리는 아이를 달래며 왼쪽 콧속에서 허연 물체를 빼냈다. 뽀빠이라고 쓰인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날긋날긋해진 비닐이었다. 색이 바래진 얇은 비닐을 집게로 들어 올린 의사는 혀를 내두르며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비닐을 보고 또 보고 했다.


엄마는 하루 생업을 공쳤지만, 난제를 해결하여 당당해진 발걸음으로 귀가했다. 이모네 식구들을 불러 푸짐하게 차린 저녁 밥상에서 외할머니의 관찰력과 엄마의 입담이 빛을 냈다. 콧속 깊은 곳에 어떻게 뽀빠이 봉지가 들어갔으며, 그렇게 오랫동안 콧마루 안쪽에 그것이 있을 수 있느냐고, 큰 애들이 장난 삼아 넣은 것 아니냐고, 오빠와 사촌형제 모두가 의심 대상이었지만, 정작 범인은 말 못 하는 세 살짜리 '나'였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그날 밤부터 잘 웃고 놀았고 새근새근 잘 잤다. 동생 보느라 생떼를 부린 게 아니었다.

"엄마가 우리 창창을 또 살렸네. 태어나자마자 숨 안 쉬어 포대기에 쌓아 윗목에 놓은 애를 엄마가 살렸잖아."

아들이 없어 딸한테 얹혀 사느라 사위들 눈치를 봐야 했지만, 할머니는 당신만이 할 수 있는 몫으로 세 딸들과 손주들의 곁을 지켰다.

엄마와 이모들은 백사십 센티미터도 안 되는 체구의 할머니가 자신들을 놓고 도망가지 않아서, 삶을 포기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감사해 했고, 곤혹스러운 순간마다 도움을 주는 신기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놀라워하며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들의 곁에 머물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