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소년

자주색 구두와 함께 나타난

by 창창한 날들




초등학교 5학년 여름.

며칠째 소녀는 큰이모부네 짐칸 달린 자전거로 느티나무 주위를 돌며 연습 중이다.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자전거를 빼앗아 갈 오빠들이 오기 전에 한 바퀴라도 더 타야 한다 생각뿐이다.

도심으로 연결된 동네 어귀로 낯선 여자와 아이가 들어온다. 여자는 자주색 망사로 된 숄을 걸치고 자주색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있다. 소녀의 엄마 나이쯤 되어 보이기도 하고, 차림새 때문에 아가씨 같기도 하다.

여자는 한 손으로 드라마에서 나옴 직한 여행용 가방을 끌고, 다른 손으로 소년의 손을 잡은 채 잰걸음으로 걷는다. 소녀와 비슷한 또래인 소년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소년이 여자의 손을 뿌리치듯 놓는다. 소녀는 페달을 굴러 나무 뒤로 얼른 가 버린다. 급하게 힘을 쓴 탓인지, 처음 보는 남자애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그런지 소녀의 가슴이 뛴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 2:8 가르마로 깔끔하게 빗어 넘긴 앞머리, 톡 튀어나온 이마, 젖살이 빠지지 않은 듯 도톰한 볼살, 다부지게 앙다문 입술. 위아래 맞춤 양복을 입은 아이를 소녀는 근방에서 본 적이 없다. 소년의 얼굴이 선하다.

소녀는 왼쪽 다리를 바윗돌에 올려놓은 채 그들이 어디로 움직일지 궁금해하며 나무 뒤에 숨어 있다. 여자가 소녀에게 묻는다.

“얘, 냉면집이 어디니?”

소녀는 허둥지둥 자전거를 움직여 모습을 드러내려다 바윗돌에 왼쪽 복숭아뼈가 긁힌다. 상처가 나 따가운 중에 손으로 냉면집을 가리키며 대답한다.

“조기요.”

허름한 문짝의 귀퉁이에 '냉면'이라고 쓰인 낡은 판자가 대롱대롱 달라붙어 있다. 소녀의 큰이모가 운영하는 느티나무집 앞 냉면집은 세 마을로 나뉘는 길목에 있어, 동네에 처음 오는 사람들이 길을 물으러 들르곤 한다.

"엄마 곧 나올 테니까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여자가 소년에게 당부를 하고 냉면집으로 들어간다.

소녀는 소년의 시선을 피해 느티나무 뒤편으로 자전거를 움직인다.

“그거 누구 자전거야?”

소년의 목소리다. 소년의 모습을 보지 않은 사람이 들었다면 여자아이라고 짐작할 만큼 목소리가 얇고 높다.

“우리 큰이모부 자전거야.”

소녀는 얼굴을 내밀어 답하곤 다시 나무 뒤로 숨는다.

“어른용인데도 잘 탄다. 나는 그렇게 높은 거 아직 안 타 봤는데...”

소년의 말에 소녀는 용기를 내어 나무 뒤에서 나타난다. 그때 여자가 냉면집에 대고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나온다. 여자는 손짓을 해 소년을 불러 냉면집 뒤편 본채로 간다. 소년은 여자의 뒤를 따르며 소녀를 힐끔거리다 이내 사라진다.

소녀는 소년의 뒤통수에 시선을 둔 채 페달을 밟다가 느티나무를 둘러싼 바위에 앞바퀴를 박았다. 바닥으로 나동그라진 소녀의 어깨와 무릎, 손바닥에서 금세 피가 맺힌다.

'소년이 나를 쳐다본 까닭은 뭘까. 내가 그렇게 자전거를 잘 타나. 안장이 높아서 오르내리는 모습이 우스웠을 텐데…'

그러다 소녀는 깨닫는다.

'아, 러닝셔츠!'

소녀는 사촌오빠에서 소녀의 오빠에게로, 자신에게로 이어진, 닳아서 구멍이 숭숭 뚫린 허연 러닝셔츠를 내려다본다. 볼품없이 빼빼 마르고 까만 낯빛의 소녀는 러닝셔츠를 벗어던지고 싶다.

소녀가 사는 동네는 서울이라 해도 논밭이 그대로 있는 변두리다. 동네에선 낡은 옷이 그리 흉이 될 일이 아니었고, 같은 반 친구들도 어린 시절부터 볼 것 안 볼 것 다 보며 자라온 터라 대수로운 풍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타지 사람이, 그것도 소녀와 비슷한 또래의 도시 남자아이가 등장하자 소녀는 처음으로 자기의 입성이 신경 쓰였다.

소녀는 다급히 자전거를 느티나무에 기대어 놓고 냉면집 옆에 행랑채처럼 붙은 자기네 집으로 허둥지둥 달려간다. 웬 호들갑이냐고 묻는 엄마한테 대답도 하지 않고 방구석에 놓인 홑이불을 가져와 얼굴을 덮고 숨는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 러닝셔츠'

소녀는 러닝셔츠를 벗어서 방구석으로 던져버린다.

조금 뒤 큰이모가 엄마에게 나지막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사라고 하기엔 달랑 여행용 가방 하나인 게 이상하잖아? 첩살이하는 여자처럼...”

이모는 그 모자가 야반도주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라고 한다. 소녀는 '야반도주'가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어렴풋하게 흉이 될 만한 일일 거라고 짐작한다.

이모네 세 살러 들어오는 집들은 사연이 다 있었다. 이모는 안채 맞은편에 임시가옥을 만들어 세를 주었는데, 말없이 떠나버리는 사람들 때문에 속을 많이 썩었다.

“금반지를 다섯 개나 맡겼다며.”

엄마는 미심쩍은 듯하면서도 이모를 위로한다.

엄마는 어린 딸이 아무렇게나 입을 놀릴까 봐 어른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듣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엄마와 이모가 동네에 새로 나타난 사람을 이야기할 때면 소녀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 같이 재미있어 귀를 쫑긋하곤 했다. 더욱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열두 살 소녀의 관심을 충분히 끌 만했다.

소녀는 금반지를 보고 싶었지만 곧 다음 날을 걱정한다. 하루 종일 자전거도 타야 하고, 술래잡기도 해야 하고, 고무줄도 놀아야 하는데…

소녀는 서랍을 열어 옷가지를 들춰본다. 한숨을 쉰다.


몇 개월 뒤 빗줄기가 세찬 어느 날 하굣길에 소녀는 바지가 축축하게 젖은 채 집안으로 들어섰다.

소녀에게 수건을 건네며 엄마가 말했다.

"이 아주머니 머리 다 해 드리면 뒷방에 청소하러 갈 거야. 미용실에 손님 오면 엄마 불러."

첫날 본 이후 소년과 말도 나눠보지 못했는데, 소녀는 소년이 살던 방으로 달려갔다. 문이 열려 있었다. 텅 빈 방에 들어간 소녀는 자기네 집 쪽 벽에 귀를 대 보았다. 소녀네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울음소리와 엄마의 웃음소리가 작지 않게 들렸다.

소녀는 자신의 울음소리며, 형제들과 먹을 것을 빼앗느라 몸싸움했던 소리, 엄마와 아빠가 다투었던 소리들을 떠올렸다. 소녀는 속옷이 벗겨진 것 같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귓불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자주색 구두를 신고 온 여자처럼 나이가 들어버린 소녀의 머리 한구석에는 여전히 소년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소년과 그 애의 엄마 이야기가 끝내 미스터리로 남은 까닭이다.

매일 느릿느릿 흘러가는 동네의 빤한 일상에서 소년과 여자가 등장했다 퇴장한 이후, 소녀에게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솟구쳤다.

빗줄기가 세차게 내리던 날 그들은 어디로 간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