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같은 너희들의 장례식

2009. 2. 28

by 창창한 날들

사진 출처 : 살바도르 달리 <슈거 스핑크스>




해마다 2월이면 유난히 춥고 마음이 붕 뜬 채 지낸다.

2009년 2월 28일.

그날은 두 아이가 이 세상에서 살기를 바랐으나 떠나야 했던 날이다.

동시에 그 아이들의 엄마가 태어난 날의 하루 전날이다.

며칠 전까지도 새 학년을 앞두고 부푼 마음을 재잘거리던 아이들.

자기 집에 놀러 오라고 소리치던 아이들.

한 날 한시에 세상을 떠났다.

사일장을 치르고 발인 날에 추적추적 차가운 비가 내렸고, 남편은 혼자 산속으로 들어가 그 애들의 뼛가루를 뿌려야 했다.

아이 부모가 찾아갈 곳이 없게 만들어야 한다는 집안 어른들의 말 같지도 않은 의견 때문이기도 했고, 정신줄을 놓은 형 처지를 생각한 남편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힘든 일을 치른 뒤 남편은 몇 달 동안 밤에 불도 끄지 못했고 집에 혼자 있지도 못했으며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그 아이들이 세상에서 살지 못하게 된 이유를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 애들은 분명히 우리와 함께 몇 년을 살았으니 그 애들을 추억하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남편은 그러기를 반대했다.

남편과 헤어지던 그 해 2월에도 내가 아이들 이야기를 꺼냈다가 크게 싸웠다.

남편은 다 잊었다면서도 그 애들 이야기만 나오면 소리 지르며 못 견뎌했다.

만약 내가 아직 결혼 유지 상태였다면 이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은 그 아이들을 애도하고,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산이와 강희는 살았다면 대학생들이다. 친조카들이다.
아주버님네와 우리 가족은 시부모를 중심으로 가깝게 지냈고, 친정 식구보다 자주 만났던 것 같다.
조카들은 사촌인 내 아들을 친형 이상으로 따르고 사랑했다.

강희는 전화하기를 좋아해서 제 엄마가 연결해 주면 내게 '작은엄마 사랑해요'하며 귀여운 목소리를 들려주곤 까르르 웃었다.

강산이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까지 강산이는 두 번의 수술을 받아야 했고, 과잉학습행동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는데 사회성이 부족할 뿐이었고 매우 뛰어난 면이 있었다.


아주버님은 우리 아들을 무척 예뻐해 주어서 제 아빠가 휴가를 나와도 아이는 큰아빠에게만 안길 정도였다. (아들 백일 잔치를 치른 뒤 남편이 군대를 가게 됐다. 그동안 시댁에 살며 아이를 키워야 했는데 그때 아주버님이 미혼이어서 함께 살았다.)


아이들 엄마 역시 천성이 아이를 좋아한 덕에 자기 아이들과 내 아들을 삼 남매로 불렀고, 우리 부부가 몹시 바쁘던 해에는 '삼 남매'를 묶어 4박 5일 여름휴가를 떠나기도 했다.

여자 혼자서 세 아이를 태우고 남해를 돌았다.

한창 극성을 떨 나이인 여섯 살, 여덟 살, 열네 살이었다.

아이들 엄마는 사진을 재치 있게 잘 찍었는데, 그때 정경이 담긴 사진이 머리에 선명하다.

모래밭에 몸의 반은 묻힌 채 세 아이들이 웃고 있는 모습이다.


시부모는 장례식을 마치자마자 아이들의 사진을 모두 없앴다.

남편도 내게 그렇게 하라고 했으나 나는 그때의 사진을 숨겨두었다.

왜 그 애들이 이 세상에 온 적이 없던 것처럼 해야 하는가.

남편에게 몇 번이나 항변했지만 그럴수록 남편은 그런 내게 정 떨어진다고 했다.

한 치 건너 두 치라며 그 애들을 추억하려는 나를 모질게 몰아붙였다.

나는 혹시라도 그 애들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날이 올까 봐 두려웠다.

남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작은방 베란다 선반 맨 아래에 그 애들을 숨겨주었다.

남편이 집을 비운 날에 그 애들이 생각나면 몰래 꺼내서 보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강산이와 강희의 얼굴에 그림자가 비쳤다.

아이들의 눈동자가 깊고 어두워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너희를 이렇게 숨겨두어야 하는구나.


아이들 성정이 우리 아들처럼 소통이 잘 되는 타입이 아니어서 답답해한 적이 많았다.

명절이나 어른들 생신에 두세 밤을 자고 헤어질 시간 즈음이 되면, 두 아이가 짜증내고 울고 심술부리는 일이 번번이 생겼다. 우리 부부와 시어른 모두 그런 모습을 보기 언짢아했는데, 우리 아들과 비교해서 그랬고, 그런 마음을 가졌던 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너희가 아름답게 살아갈 날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어른들이 너희를 잃은 아픔을 견디지 못해서, 너희들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너희들의 이름을 불러주지 못하는구나.

강산아, 강희야.

그곳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포근하게 쉬고 좋아하던 그림도 실컷 그리려무나.

나중에 편지 쓸게.




이 일은 우리 부부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 한 해 모든 날은 싸움의 연속이었고, 다음 해부터 나는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재작년에 이혼이 거론된 날도 아이들의 기일이 다가오는 2월이었으니. 그 날 이후 위태로운 시간이 흘렀고 해를 넘기지 못하고 우리 둘은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