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우리 선생님
오래도록 빛나는 등대처럼
1. 고 1 국사 시간
철쌤은 器(그릇 기)를 설명하는 데 한 시간을 꼬박 바쳤다.
가운데 개고기를 놓고 여러 입이 모여 앉아 뜯어 먹는 장면을 표현했다는 내용이다.
몸을 아끼지 않는 철쌤의 열정 넘치는 설명에 열여덟 살 여학생들은 볼이 얼얼해질 정도로 웃었고, 뱃살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 수업이 '역사'라는 의미와 어떻게 연결지었는지보다 그날의 웃음, 그날의 무경계 이미지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짙게 남았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곧 입시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여학생들은 글자 하나를 설명하는 데 소중한 첫 수업 시간을 채운 철쌤에게 매료되었고, 국사 과목을 좋아하는 친구들, 철쌤을 흠모하고 존경하는 친구들이 생겼다.
철쌤은 우리를 독립된 인격체로 대해 주었다. 반지성의 미숙한 존재들의 목소리를, 아무리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어거지를 피워도 들어주었다.
철쌤의 유머와 여유, 인간에 대한 예의가 바탕이 되었다.
2. 입학식
이 천 명을 수용하는 대강당 단상에서 멀리서도 빛나는 머리가 담임이라니, 소녀들은 매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철쌤은 '민족의 태양'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우울한 마음을 안고 교정을 가로질러 배정받은 교실로 들어갔더니 진초록 코르덴 재킷을 입은 선생이 들어왔다.
아직 서른이 안 됐다고 자신을 소개한 철쌤은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하얀 낯빛이 백면서생 같으면서도 귀하게 자란 인상을 주었다. 여기저기에서 탄성과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중년의 아저씨가 아니라 우리와 단 열한 살 차이나는 청년이어서 좋았다.
빛나는 외모를 가졌음에도 꾸밈 없는 소탈한 옷매무새로 당당하게 우리 앞에 선 그라서 좋았다.
입시가 아닌 '따스한 연대와 성장'을 강조해서 좋았다.
철쌤은 이후 열두 반 문이과 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그릇 기를 설명한 첫 수업부터 위트 있는 그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3. 믿음
강북에서도 야간자율학습에 철저했던 학교답게, 담임샘들은 야자 시간에 아이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감시견 노릇을 했다.
오후 수업이 끝나갈 때쯤 학생들은 담임샘과 협상의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모든 1학년에서 우리 반은 남은 학생들이 가장 적었고, 그 일로 담임이 윗선들에게 수모를 겪는다는 말을 들었지만, 어린 우리는 모르는 체했다.
인간적인 담임에게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만큼은 눈치가 빨랐으면서, 학교에 남지 않는 것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였으므로 자주 담임을 배신하였다.
담임은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우리에게 보복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바보스러울 정도로 선량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의 갑갑증을 이해했으며, 혼자서라도 공부하겠다는 우리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이다.
성적으로 편애하지 않았을 뿐더러, 가진 것 없는 나와 같은 학생들의 호프였다.
4. 이별과 새로운 만남
철쌤을 오래도록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짧은 만남, 긴 이별 때문이었으리라.
우리를 단 1년 동안 맡은 뒤 동료 샘과 사랑하게 된 철쌤은 남자 고등학교로 전근을 가야만 했다.
소녀들은 울면서 철쌤에게 장미를 한 송이씩 바쳤고, 철쌤은 온몸에 장미를 꽂은 채 우리의 작별 인사를 마음으로 받아 주었다.
고 3을 앞둔 겨울방학에 우리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 위해 철쌤과 도봉산을 등반하였다.
철쌤의 학교 남학생 여섯 명이 철쌤의 뒤를 밟아 따라왔고, 이후 그 친구들과는 스물이 넘어서도 등산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 친구로 어울렸다.
철쌤을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서로가 믿을 만하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그 사이 철쌤은 역사학 교수가 되었고, 국정교과서 반대 투쟁에 앞장섰으며, 티브이 현대사 강의에도 몇 번 출연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였다.
5. 철쌤과 수니샘
철쌤이 사랑한 수니샘은 함박웃음으로 상대를 무장해제하고 더불어 웃게 만드는, 따뜻하고 사려 깊은 분이었다.
십 여 년 전부터 나는 철쌤보다 수니샘께 연락하고 지내면서, 자택에 방문하더라도 수니샘과 차를 마시고 걷는 등 더 밀도 있는 대화를 많이 나누는 사이가 됐다.
약점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없듯 재작년에 수니샘에게 들은 말이 좀 놀라웠다.
"너희가 철쌤을 너무 존경하는 거 아는데, 철쌤 나한테는 너무 나쁜 사람이야. 미안해."
힘들다는 티를 잘 내지 않고 수십 년 결혼 생활을 해 온 수니샘을 알기에 그런 말씀이 나올 정도면 어떤 시간을 지내왔을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일면으론 '인간 철쌤'의 모습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가 이혼 후 처음 찾아뵈었을 때였으니 그 말의 속뜻을 모를 리 없었다.
두 분이 아름답게 노후의 삶을 이어나가길 기도할 뿐.
6. 올해 스승의 날
올해 스승의 날에 연락드렸더니 수니샘이 철쌤의 입원 소식을 알렸다.
의식을 몇 번 잃었다 깨어나신 어느 날, 철쌤과 통화했는데 특유의 유머러스한 농담을 하였다.
"창창 선생, 내 생각 그만하고 글이나 많이 써."
두 달 뒤, 칠월에 문병 겸 자택을 방문했다.
철쌤은 뼈만 앙상한 얼굴로 예의 환한 웃음을 지으며 온 힘을 다해 제자들을 환대하였다.
웃는 게 얼마나 큰 에너지가 필요한 일인지, 철쌤의 트레이드 마크인 웃는 얼굴이 내내 일그러져 있어 안타까웠다.
7. 굴곡진 삶에서 나의 등대
대학 새내기로서 등록금 투쟁에 동참하여 총장실 점거 대열에 합류하는 순간,
한 남자가 좋아서 부모 품으로부터 도망하던 날,
대학을 거부하고 사회로 발을 디디던 순간,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통 찾지 못하던 우울증의 나날 어디 즈음에서,
철쌤은 나의 등대로 늘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나의 질문에 묵언으로 답해 주곤 했다.
정의와 용기, 연대를 삶의 기준점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철쌤을 만난 이후부터였다.
아무것도 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한동안 찾아뵙지 못한 때가 있었다. 몇 년이 흐른 뒤 처지를 바꾸어 보니 나만의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내 제자가 자신의 처지가 어떻든 내게 당당하게 소식 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 스승인 철쌤도 갖고 계셨으리라. 성공한 제자만 반기는 철쌤일 리가 없을 테니.
당당히 찾아뵙지 못하는 동안에도 아들의 돌사진과 근황을 이메일로 보내고, 해마다 소식을 전했다. 아들의 대학 합격 소식을 전화로 드렸을 때 얼마나 좋아해 주셨는지.
나중에야 자랑스러운 내 남편과 함께 방문드렸다. 그리고 몇 년 뒤 그 남편과 함께 오라는 인사 말씀에 답을 못하고, 혼자 찾아뵈었다. "그 남편 이제 없어요. 샘"
'언젠가 성공하면'이라는 핑계로 기약 없는 세월을 보냈던 때가, 철쌤의 사유를 만날 기회를 날려버린 시간이 안타깝다.
고등학교를 중퇴했던 친구가 삼십 년만에 철쌤께 전화를 드렸을 때, 자신의 삶을 실패라 생각한 친구가 이십 년만에 전화드렸을 때, 철쌤은 제자들의 목소리를 단박에 알아채셨다. 다들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좀 더 떳떳해지면 가서 뵈리라, 했을 것이다.
8.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2022년 11월 24일.
철쌤은 우리의 곁을 영영 떠나고 말았다.
코로나 격리 중인 나는 수니샘의 전화를 받으며 속으로만 울었다.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갈 수 없는 처지가 너무나 운명적으로 생각되었다.
칠 개월 동안 생사를 오가는 철쌤 가까이에서 몹시 아팠을 수니샘은 철쌤과 많은 대화를 나누어서 맺힌 것이 남지 않았다고 하였다.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사람만 미안하고 부끄럽고 안타까움이 남는다.
철쌤
향년 63세.
제가 이런 글을 쓰지 않기를 몇 달 전부터 바라왔어요.
황망하게 저희들 곁을 떠나셨지만
고통 없는 그곳에서 평안하게 쉬세요.
사랑하고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