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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가림 May 10. 2022

사람들은 극단적인 사람을 싫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픈 트라우마를 낯낯이 까발려야만 했다.

1학년 1학기 연기수업의 마지막 과제는 트라우마를 무대 위로 승화시키기였다. 


몇 번이고 받은 종이를 다시 읽어보고 교수님의 말씀을 다시 들으려 애를 썼다. 

그날 교수님은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여러분이 무대에 올라가 그저 과거를 털어놓는 과제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프고 무서웠던 어두운 기억을 감추는 과제로 만들어도 됩니다. 전혀 알아챌 수 없어도 좋아요. 그저 그 기억들을 여러분이 어떻게 변화시키고 예술로 승화시킬지가 요점입니다."


순식간에 차분해진 무대 위의 학생들은 잠시 후 질문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교수님 꼭 트라우마 여야 하나요?"


"살면서 가장 힘든 경험을 공유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가장 깊게 느꼈던 감정을 들려주세요."


"교수님 저는 제 트라우마에 대해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누구도 몰라도 돼요. 무대 위에 어떤 형태로 승화시키던 그것은 학생 자유입니다."


창과 방패의 싸움 같은 질의응답 시간이었다. 얼굴을 붉히며 찡그리는 표정들이 많이 보였다. 사적인 부분을 과제로 만들어야 된다는 부담감은 프라이버시가 중요한 문화권에 있어 굉장히 난해한 숙제였다.


그리고 나는 나의 트라우마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슬픈 감정과 기억들은 존재해도 트라우마라는 단어 선택 자체가 부담스러웠고 나에게는 없어야만 하는 혹은 있으면 이상한 꼬리표가 될 것만 같았다. 주로 비운의 주인공들이나 트라우마 탓하지 않나 싶었다. 심지어 우리는 이 과정들을 글로 기록해야만 했기에 숨이 턱 막혀오는 듯한 기분으로 수업을 마쳤다.


처음에는 거짓말을 하려고 했다. 

뭔가 대단한 트라우마를 지어내면 있어 보이지 않을까.

혹은 아예 말도 안 되는 공연으로 변화시켰다 주장한다면?


그러나 여러 번 대본을 수정하고 수정하다 보면 찜찜했다. 조금씩 다른 학생들이 무엇을 하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자세히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굵직한 이야기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불만이 많던 학생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각자의 이야기를 낯낯이 공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 달의 시간이 흘러 무려 4시간의 과제 발표가 있는 날이 다가왔다.


학생들은 입을 혹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우가 되고 싶었던 친구는
단편영화가 아닌 강간을 당하는 영상을 찍혔고 이를 의자들을 쌓아 올려 표현하였다.

왕따를 당했던 친구는 학생들 앞에서 악보를 찢으며 피아노를 연주하였다.

색맹인 친구는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했던 거짓말들을 공연 내내 반복하며 하며 옷을 만들었다.

그날 한 친구는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하였다.

조별과제 팀원이었던 친구는 흑인이기에 받았던 차별을 빛에 반응하는 몸의 고통으로 표현하였다.

가장 친해진 친구는 도망간 아빠를 과거의 사진들로부터 추리하는 자신의 모습을 무대 위에 표현했다.

...


교실은 금세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 모든 게 너무 지나친 드라마였다.



우리는 흔히 '극단적인 사람들'을 싫어한다.

그들은 극적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퀸'이라는 수식어를 항상 논란이 되는 누군가에게 프레임을 씌어주며 답답하단 듯한 말투도 소재거리 삼는다. 조금은 이성적인 척. 우리는 대부분 남들을 판단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와 그들에 대해 '쯧쯧'이라는 의성어를 사용할 수 있는 위치라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렇지만 그날 모여있던 학생들은 모두 드라마 퀸이었다. 징그럽고 오글거릴 정도로 그들의 삶은 느끼했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만 같은 그들의 기억들은 너무나도 현실이었다. 모두가 사는 세상이 바로 드라마였다.


나 또한 나의 과제를 마친 그 순간 무대 위에 홀로 앉아 펑펑 울어버렸다. 친구들이 안아주며 나를 자리로 돌아오게 도와주었다. 한 달 동안 다시 기억해야만 하는 우리의 트라우마는 지극히 씁쓸하고 우울했기에 그날 모든 걸 해방시킨 우리는 그저 같이 울어주며 모든 걸 떨쳐버리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생각보다 냉정하다.

스스로에게 냉정한 만큼, 이를 트라우마라 수식하기에 부담감을 느낄 만큼 바쁘게 살아간다.

인정하는 순간 낙오자가 되는 기분을 겪을까 봐.

혹은 인정하는 순간 남들이 싫어하는 드라마 퀸이 되어버릴까 봐 외면한다.

스스로에 대한 외면은 서로의 깊은 공감대를 찾는 방법을 어렵게 만들고 상대방의 인생에 대한 존중은 뒤로 하게 된다. 


결국 세상은 차갑고 현실은 무서운 곳이라 인정하는 것이 나를 인정하는 것보다 쉽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싶다. 각자의 고통을 너무나도 잘 지각하고 있고 이를 인정하면 남의 고통 또한 인정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함께 울고 위로해주었지만 서로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가지는 않았다.

그저 내 치부를 드러냄을 통해 스스로를 위해 사는 방법을 한번 더 깨닫았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결국 드라마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이 답답한 느끼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소화하기 힘들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진 제공:

https://unsplash.com/@theeastlondonphotograp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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