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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짤리짤리 Nov 01. 2022

우리가 남이가: 영호남 지역편차

격차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 지역





지역갈등 문제는 매 선거철마다 빠지지 않고 부각되며 여전히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세대가 바뀌며 자연스럽게 완화될 거라고 기대했던 것과 리, 젊은 층이 참여하는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지역 비하 신조어들이 만들어지고 상호 비난은 멈출 줄 모르고 있다.

 작은 크기의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나뉘고 동과 서 마저 갈라져 갈등을 반복하게 된 원인은 정치에서 비롯되지만, 경제적 격차 문제를 먼저 살펴보려고 한다. 경제적 격차가 특정 지역의 소외론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지역갈등과 정치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결국 둘의 문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영호남: 경상도 지역을 지칭하는 영남과 전라도 지역을 지칭하는 호남을 일컫는 말. 영남의 영(嶺)은 고개, 호남의 호는 호수의 의미를 갖는 한자어로 이는 각기 문경새재와 금강을 칭함. 즉 영남은 문경새재 남쪽 지역, 호남은 금강 남쪽 지역을 의미. 이것이 바로 지금의 경상도와 전라도라고 할 수 있음.


 영호남의 경제적 격차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 계기는 1960년대부터 시작한 대한민국 경제개발계획이었다. 최초 수립 시점부터 주요 공업단지 개발이 경부선을 따라 영남지역 집중되며 영호남 불균형의 단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된 결과이지만, 핵심적으로는 크게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호남지역은 넓은 평원을 지닌 한반도의 주요 곡창지대였고 서해와 남해의 해양자원도 풍부했다. 당시는 GDP에서 농림어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50%에 가까웠던 시절이기 때문에 정책자 입장에서는 비교우위론*에 입각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호남을 농림어업에 집중하게 하고 영남지역에 공업을 개발하는 것이 전체 국가의 발전을 위해 옳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비교우위론: 영국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에 의해 정립된 이론. 한 국가가 상대국보다 모든 재화의 생산력에 있어 절대 우위에 있더라도, 양 국가는 분업을 통해 전체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올 수 있음을 개념적으로 정리. 자유로운 국제무역이 모두 에게 혜택이 될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지게 된다.


 둘째, 수출입의 관문으로서 역할은 부산항이 유리했다. 노동력 외에 이렇다 할 천연자원도 소비시장도 없었던 당시 대한민국은 경제개발을 위해 수출에 집중하는 전략을 펼쳤다. 분단된 국토로 인해 육로는 차단되어 국가 간의 상품 거래에 있어서는 사실상 섬나라와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항구가 주요 물류기지의 역할을 해야 했다. 인천항은 수도권에 더 가깝긴 하지만 서해 안쪽에 자리 잡아 국가를 오가는 대형 선박의 항로로서의 역할은 한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항구가 더 유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인천항은 거대한 중국시장과는 가깝긴 하지만 한국이 경제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던 60~70년대 당시의 중국은 잠자는 호랑이 불과해 수출시장으로서 가치가 없었고 대한민국으로서는 미주와 일본을 오가는 항로가 중요했다. 항로면에서 유리한 남쪽 지역 중 호남은 영남에 비해 수심이 낮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 대형 항구가 발전하기 어려운 환경이었고 결과적으로 부산항을 컨테이너 부두로서 본격 개발하게 된다. 이를 따라 수출기반 산업단지들도 입지적으로 유리한 영남권을 중심으로 세워지게 된다.


 셋째, 영남권 출신 사람을 많이 기용했다.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차지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1963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경쟁자 윤보선 의원을 1.5% 차로 따돌리고 가까스로 대한민국 5대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하게 된다. 초박빙의 지지율과 군출신으로서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 탓에 믿을 만한 사람이 절실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과 같은 고향의 영남권 출신들을 주변에 두게 된다.

 63년 대선 당시의 지지 양상을 보면 지금과 같이 동서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남북으로 표가 갈라져 북쪽 지역은 윤보선 후보가 우세, 남쪽 지역은 박정희 후보가 우세한 모습을 보였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영호남의 지역감정이 크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한다.

 하지만 67년 6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면 동서로 표가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박정희 후보의 주요 공약 중 하나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이었고 윤보선 후보는 이에 맞서 그 유명한 '호남 홀대론'을 처음 들고 나왔다. 정치권이 국민을 본격적으로 갈라놓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전략이 유효할 수 있던 배경에는 여당에서 수도권과 영남권을 잇는 경부고속도로를 공약할 때, 반대편 호남지역은 철도마저 상하행선이 하나의 철로를 공유하는 단선뿐이었다는 사실적 근거도 있었다. (호남선 전구간의 복선화는 2003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된다.)

 두 번의 선거를 통해 정치 지형은 바뀌었어도, 영남권은 변함없는 박 대통령의 지지기반임이 증명되었다. 해당 지역 출신 인사들이 사회 주류로 진출하며 각종 경제정책에도 영향을 끼쳤고 영남에 유리하게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산업 발전이 더뎠던 호남권은 경제 성장에 부침을 겪었고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떠나며 인구도 정체되었다. 반면 영남권은 수출 산업의 호조로 꾸준히 인구가 증가하며 양쪽 지역의 경제적 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모든 것이 호남을 고의적으로 억누른 결과라 할 수 있을까?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당시 우리에겐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고 영남이 우선순위가 되기 더 유리한 입장이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이후 경제의 집적효과 등이 발생하며 산업이 집중되고 격차가 더욱 벌어진 것은 정책자의 역할도 있겠지만 무수한 시장 참여자들의 의사결정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불균형 사례는 해외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경우 북부는 공업, 남부는 관광과 농업이 중심이 되어있고, 중국의 경우 동부 해안도시를 따라 수출주도 경제를 발전시키며 동부 주요 지역과 내륙 간의 격차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커져 버리기도 했다.

 시대는 달라졌고 모든 것은 변한다. 영남권이 한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해 오며 호남과의 경제적 격차를 벌려온 것은 사실이지만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고성장은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지역을 이끌던 많은 산업들이 중국이나 동남아 등지로 이동했고 신 성장산업은 과거 산업이 떠나간 빈자리에 터를 잡지 못했다. 호남이 그러했듯 영남 역시 성장 정체와 일자리 감소를 겪게 되었고 청년들의 인구 유출로 이어지고 있다. 영남을 떠난 이들의 상당수가 수도권에 터를 잡으며 공고할 것만 같았던 부산의 대한민국 제2위 도시 타이틀도 위태로워진 상태다. 부산의 지역 내 총생산(GRDP)은 이미 인천과 대등한 수준이 되었고, 인구 유출이 지금과 같은 추이로 계속된다면 머지않은 시점에 인천에 추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과거 산업화 시대 영호남의 격차가 두드러졌다면, 정보화 시대 그 격차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의 차이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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