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
간만에 약속이 있어 종로에 들렀다. 높이 솟아 오른 건물만큼 내가 작아지는 곳. 오 년 전 만났던 애랑 이곳에 같이 온 적이 있다. 지하철 입구로 나오자마자 처음 상경한 애들처럼 고개만 치켜들기 바빴지. 이곳은 언제 와도 낯설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 애랑 함께라면 뭐든 다 괜찮았던 것 같다. 궁의 돌담길을 걸으면서, 탁 트인 광장을 눈에 담으면서, 미로처럼 빠진 으슥한 골목길을 헤쳐나가면서, 우리는 앞으로의 미래를 곳곳에 한 줌씩 흘리며 발걸음을 옮겨 나갔다. 어른이 된 먼 미래에 다시 주워갈 거란 믿음이 공공연하던 채였다.
그 애가 말했다. 한 십 년쯤 지나면 이곳 어딘가에 우리 자리 하나씩은 있을 거라고. 나는 한껏 고양된 그 애의 눈을 바라보며 충실히 일 인분의 몫을 다하는 우리의 모습을 잠깐 생각했다. 말끔히 차려입은 복장과 사원증을 목에 두르고 종로의 거리를 거니는 모습. 그려본 미래엔 필연적으로 우리가 함께라는 가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렇게 각자 주어진 일을 열심히 마치고, 퇴근 시간이 되면 함께 근처 골목의 맛집을 수소문해 가며 찾아 들르는 거지. 지칠 때면 종종 청계천 산책로를 걸으며 푸념 섞인 말을 주고받고, 헤프게 울고 웃기도 하면서 서로의 삶을 견고히 지탱하며 끌어안아주는 삶.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건물들처럼, 여전히 종로 곳곳에 산재된 마음들이 녹슬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종로의 건물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겨우 우리였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그때 서로에게 말해주던 꿈들은 다 무엇이었지? 나도 모르는 사이 숨겨놓은 마음들이 한 뼘씩 불쑥 자라 시선을 사로잡았다. 시간에 풍화된 기억처럼 희미하지만 여전히 반짝이는 모습들. 저 멀리 소실된 우리의 지향점들이 이곳엔 여태껏 남아있는 듯했다.
오 년이 지난 지금, 그 지향점들이 얼마나 도달하기 힘든 곳이었는지 조금씩 체감했다. 체념과 도달을 반복하는 생의 속성을 몇 번 겪고 나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 차차 사라져 가는 옛 건물처럼, 변두리에 밀려나는 기억들을 부여잡고 하루를 버티는 나로선, 얼마간 그 애와 함께 나눈 얘기들을 살만했던 삶의 틈새를 피워 올리는 매개체로 삼기도 하는 거였다. 제대로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무튼 결국엔 이별하게 되었지만.
간만에 약속이 있어 종로에 들렀다. 그 애가 일 인분의 몫을 충실히 해내고 있단 얘기가 들려왔다.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말도. 미로 같은 건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애를 떠올렸다. 오늘은 소설. 과거로부터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이곳에 남겨둔 우리의 꿈들이 한 줌씩 흩어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