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는 만 년 동안 사랑해

feat. 중경삼림

by 유창민

지친 밤, 나는 자리에 누워 지난날에 사랑했던 어떤 애를 곰곰이 생각했다. 누군가를 생각하다 잠들면, 필히 그 사람이 꿈속에 나온다는 미신 같은 말에도, 새벽은 괜스레 영문 모를 정당성을 부여해가며 나의 이성을 서서히 마모시켰다. 이 시간쯤 떠오르는 생각들은 대부분 물성이 없다. 물성이 없으므로, 불현듯 떠오르는 감정이나 생각 같은 걸 원하는 틀에 맞춰 주물럭대며 쉽게 모양을 잡을 수 있다. 이를테면 남몰래 눈물을 훔치던 기억이나 누군가를 절절히 그리워했던 기억 같은 거. 그런 기억도 결국 사랑의 일부라 여기며 모양을 잡다 보면, 지난날에 했던 사랑도 꽤나 구색을 갖춘 그럴듯한 마음으로 남겨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음, 그러니까 이 모든 건, 보다 덜 초라한 나로서 새벽을 견디기 위한 일종의 당위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모든 공기가 제자리에 멈춘 것처럼, 방안을 가득 메운 적막은 내가 피운 상념을 먹고 무럭무럭 자랐다. 고요해질수록 속이 텅 비었다. 찾아오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선 빨리 이 적막을 물리쳐야 할 텐데. 리모컨을 집어 티비를 튼다. 물성이 없는 모양들을 소리로 채울 생각이었다. 상념을 멈추기 위해 켠 티비엔, 전 연인이었던 메이와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허겁지겁 파인애플 통조림을 까먹는 허지무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이전에 즐겨봤던 ‘중경삼림’이란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하필이면 나오는 영화가 그 애와의 기억이 잔뜩 묻은 영화였던 거지. 나는 이 모든 게 다 결국 정해진 순리였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속절없이 다시 그 애를 떠올린다.


옛날에 즐겨봤던 영화가 몇 편 있다. ‘봄날은 간다’,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허진호 감독의 작품과,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 그리고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다고 했던, 지금 나오는 왕가위 감독의 작품 같은 거. 단칸방 한편에 나란히 앉아 그 애와 함께 ‘화양연화’나 ‘중경삼림’ 같은 영화를 보고 있다 보면, 지독하게 냉정한 사랑의 현실 속에서도,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한 줄기의 낭만적인 무언가를 체감할 수 있었다. 특정한 사물(파인애플 통조림 같은)에 메타포를 형성하여 깊이 여운을 주는 방식, 심금을 울리는 대사, 홍콩 밤거리에 펼쳐진 네온사인의 채도와 도무지 걷잡을 수 없는 결말까지.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앉아있으면서도 늘 사랑을 골몰하던 내게, 그의 작품은 어떤 날엔 물결처럼 작용했다가, 또 어떤 날엔 고요히 나를 가라앉혔다.

그날 우리의 대표적인 화두가 된 건 ‘중경삼림’의 첫 번째 에피소드, 허지무의 이야기였다. '비밀번호는 만 년동안 사랑해', ‘만약 기억이 통조림이라면, 그 통조림은 유통기한이 안 끝났으면 좋겠다.’ ‘그래도 꼭 날짜를 써야 한다면, 일만 년으로 쓰고 싶다.’ 같은 울림 있는 대사들을 무수히 배출해 낸 에피소드. 그 애와 함께 볼 땐 '비밀번호는 만 년 동안 사랑해' 같은 대사에 꽂혀, 만년이란 시간을 주제로 우스갯소리를 나누었는데, 그 애와 헤어진 이후엔 '이별 후에는 달리는 게 최고다. 그럼 몸속에 있는 수분이 다 빠져나가는 바람에 울지 않을 수 있다' '만약 기억이 통조림이라면..(중략)' 뭐 그런 대사들만 줄줄이 꿰차고 다녔다. 일컨대 허지무의 에피소드는, 이별의 교보재로 삼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이별한 이의 막막함과 울컥한 심정을 훌륭히 대변했다. 한껏 볼품없어지는 것 또한 썩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라고, 구태여 내게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별을 잘 견디기 위해 내가 만들어낸 일종의 방어기제는 아니었을까? 한때는 그 애와의 이별을 도무지 견딜 재간이 없어서, 울음이 턱끝까지 찬 날이면 종종 공터에 나가 미친 듯이 달리며 수분을 빼기도 하고, 또 바에 처음 들어온 여자를 사랑하기로 마음먹는 허지무처럼, 누구든 적당히 사랑해 볼 요령으로 쉽게 마음을 주는 짓도 거리낌 없이 했었지.


간밤엔 메이를 그리워하는 심정으로 그 애를 떠올렸다. 떠올릴수록 속이 텅 비었다. 무언가를 꾸역꾸역 집어넣어야만, 내가 겨우 나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 먹은 파인애플 통조림을 쌓아가는 저 티비 속 허지무처럼, 다시 돌아올 리 없는 이름을 자꾸만 갈망하고 싶었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우리의 유통기한은 겨우 그 정도였던가? 만 년의 무게에 대해 나눈 대화도, 등져 누운 그 애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순간까지도, 그게 다 차차 이별로 향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면… 나는 또 쉽게 울적해졌다. 결국은 다 이렇게 될 거였는데. 이 모든 게 다 복선이었던가? 결국은,


또다시 왕가위식 결말. 그의 작품은 좀처럼 매듭을 짓는 법이 없다. 나는 이제 무엇을, 더 어떻게 해야 하나. 결국 모르겠다는 말로 대충 뭉개버리는 수밖에 없겠지. 전원 버튼을 누른다. 오늘 밤은 별 탈 없이 잠들긴 글렀다. 후회만 더 늘기 전에 서서히 눈을 감는다. 눈꺼풀이 풀려갈수록, 취침등의 주홍빛이 네온사인의 잔상처럼 조금씩 번져갔다. 역시 새벽은 좀 애처로운 구석이 있는 것 같아. 가끔은 궁금하다. 함께였던 날의 기억은 그 애에게 어떤 모양으로 남았을까. 홀로 남아 이불을 끌어올리는 나로선, 이젠 도무지 알아낼 도리가 없다.



작가의 이전글내가 처음에 적어놓았던 문장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