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에리히 프롬
윤이는 끝내 미안하다고 말했지. 윤이가 작별을 고할 때쯤, 나는 패색이 짙은 사랑을 조금씩 몸에서 걷어내고 있었다. 서로를 사랑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이미 유의미한 무언가로 남았으니, 사랑을 소생시키는 건 더 이상 무가치한 일이라고 여겼다. 다 끝났다 윤이야. 이제 우린 여기까지인 거지. 그럼에도,
‘그 애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문장도, 더 나아가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문장도, 막연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우리가 사랑으로 결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결속되어 있었으므로, 우리는 사랑의 틀 안에서 졸여낸 다정함들을 서로에게 나눠줄 수 있었던 셈이다. 윤이를 떠올릴 때마다 붙는 수식은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고, 저물어 간 사랑도 어쨌거나 사랑이라고 불린다는 점에서, 우리가 했던 사랑은 얼마간의 시사점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사랑의 의의를 명백하게 남겨두었으니, 머지않아 작별을 말하는 일만 남은 거지 이젠. 그런 식으로 빚어낸 유의미한 것들이 켜켜이 쌓여갔다. 해를 거듭할수록, 또 수많은 이별과 만남을 반복할수록, 다음번엔 더 잘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럼 더 잘 사랑받을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여기서부터 머릿속을 떠도는 의문이 하나 생긴다. 사랑의 메커니즘에 관한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더 잘 사랑한다는 말이 애초에 맞는 말이긴 한 건가? 애당초 사랑의 메커니즘이란 게, 이토록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거였나?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따위의 말처럼, 노력을 수반한 사랑을 정말 사랑이라 부를 수 있긴 한 건가? 사랑을 명료히 정의 내릴수록, 그리고 본질에 더욱 다가가려 할수록, 머릿속을 맴도는 물음표만 점점 더 커져갔다. 역시 쉽지 않다. 태초부터 사랑은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만연한 것임에도, 여전히 명쾌히 서술할 수 없는 불가해한 영역으로 남아 있지 않은가. 웹사이트에 등재된 사랑에 관한 논문만 수십 개다. 또렷하게 정의될 수 없다는 점 또한 사랑의 특성이라 여기며, 잠깐 윤이를 생각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원래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내가 그걸 다 아는 사람이었다면, 윤이가 나를 떠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음, 잘 모르겠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저서를 관통하는 핵심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닌 ‘기술’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로 사랑은 능동적인 의지이자 능력이지만, 반복을 통한 훈련을 자행해야 하는 일종의 기술이라는 것. 그러니까 한동안 내 머릿속을 빙빙 돌던 ‘더 잘 사랑한다’라는 문장 또한 나름의 타당성을 갖춘 셈이었다. 윤이가 내게 보여준 다정함과 세심함, 맞잡은 손끝의 온도와 머리칼의 감각, 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사랑을 건네기 위해 골몰했던 밤과, 주고받았던 편지, 아이클라우드에 남은 수많은 사진과 대화내역까지, 모두 켜켜이 쌓여 더 나은 사랑의 재료로서 작용된다는 점이, 역시 윤이의 기억은 내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음번엔 좀 더 잘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젠 윤이를 어떻게 잊어야 하지? 여전히 윤이도, 사랑에 관한 수많은 물음표들도, 내내 머릿속을 헤집고 있다. 그 해답 또한 먼 미래엔 공공연해지지 않을까. 조금 더 그리워하다 보면, 사랑 같은 어렴풋한 감정들도 공식처럼 정립되는 날이 오긴 할 거였다. 그때 작별을 말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