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호가의 삶> 프롤로그
다니던 회사가 사업을 접으면서 갑작스레 백수가 됐다. 당분간은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됐다. 아무것도 안하고 지내려면 아무것도 안할 수도 있다. 뭔가를 하려면 할 수도 있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게 좋을까 고민했다. 쓸모에 대해 생각하기를 잠시 내려놓고,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직업이 사라진 지금 상황에서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 결국은 매일 내가 하는 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나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은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제주에 와서 기획자로 일하는 동안 많은 창작자들을 만났다. 등단 작가, 전업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요리사, 유튜버… 또 이렇게 한 가지 직업으로 명명하기는 어렵지만 직장을 다니면서, 생업은 생업대로 유지하면서, 자기만의 작품을 꾸준히 만들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결과물을 볼 기회가 많았다. 그들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만드는 그 행위 자체가 좋아서 계속 해왔고 지금도 계속 하고 있다.
쓰는 사람보다는 읽는 사람의 정체성에 가까웠던 나는 조금씩 쓰기 쪽으로 행동을 옮기기 시작한다. 아침에 모닝페이지를 쓰고, 저녁에 일기를 쓴다. 아침에는 주로 오늘 하고 싶은 일을 쓰고, 저녁에는 오늘 좋았던 일을 쓴다. 생각을 노트에 적어내면, 어렴풋하게만 갖고 있던 생각들이 좀더 구체적인 모습을 띄게 된다.
쓴 글을 보다 보니, 나는 나쁜 일, 힘든 일, 괴로운 일보다는 즐거운 일, 기쁜 일, 행복한 일 쪽에 더 마음이 기우는 사람이라는 걸 뚜렷이 알게 됐다. 좋은 것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가끔 다시 펼쳐보고 싶다.
그리고 이토록 작은 기쁨을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이런 얘기를 했을 때, 독서모임의 한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행복의 기원> 책에서 이런 말이 나와요.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에서 온다고요.”
<애호가의 삶>이라는 주제를 잡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쭉 적었다. 잘하는 것도 아니고, 매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좋아하는 마음, 그 뿐이다.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일들. 그것들이 내 일상과 매일을 구성한다. 나는 좋아하는 일에 기꺼이 몰두한다. 조급해하지 않으며, 이것을 즐기는 데 많은 시간이 들지도 않으므로, 충분히 즐기려 한다. 그리고 지금의 이 ‘좋음’을 기록해둔다. 훗날에 생활이 팍팍해진다고 느낄 때, 혹은 지금 이 날들이 그리워 질 때(언제나 지난 시간들이 그리워지게 마련이니까) 들춰보면서, 2024년에 내가 좋아한 그것들이 또 나를 만들어냈구나, 그런 것을 확인하고 싶다.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지만, 평가나 인정, 완벽주의를 내려놓고 쓰기 위해 노력한다. 한 문장, 한 문장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은 나 자신을 위해 쓴다는 마음이다.
내가 쓴 이 문장을 한 번 더 새기고, 애호의 대상들을 펼쳐보인다. 설레고 두근거리는 마음, 초보자의 들뜨는 마음을 간직한 채.
“중요한 건 초보자와 아마추어인 상태로 남는 거란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시작하면 끝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완성되지 않으면 그게 포기나 실패라고 생각하죠. 그건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짜 도달해야 하는 건 사실 매번 하던 걸 엎고 새로 시작함에 두려움이 없는 성실한 초보자이자 아마추어, 실패자이자 구도자인 상태를 유지하는 거다 이말입니다. 트랙에 수많은 출발선을 긋다 보면 결국은 출발선이 결승선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 박지영, <고독사 워크숍>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