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호가의 삶> (1) 그리기
오일파스텔로 그림 그리는 걸 배우러 다니고 있다. 일러스트레이터 선생님에게 배우는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이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지 듣고 따라해보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선생님의 그림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 꽃이나 풀, 고양이 같은 소재가 주로 등장하고, 거기에 사람이 작게 들어가는 편. 나는 이런 그림을 좋아한다. 복잡하지 않은, 서투른 것처럼 보이는 세련된 그림.
스케치를 하고 그 안에 오일파스텔을 문질문질 하며 채운다. 처음으로 오일파스텔을 종이에 문지르는 순간, 바로 이 재료에 푹 빠지게 됐다. 마음의 평화를 찾기에 이만한 게 없겠는 걸… 좋아하는 색깔을 골라 종이에 넓게 칠하고, 뭉쳐있는 부분을 손으로 문질러 편다. 꾸덕꾸덕한 오일파스텔에서 색깔이 퍼져나오는 것을 본다. 어떤 그림이 되지 않더라도, 오일파스텔로 색을 칠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분 좋은 순간.
꽃을 그리는 날이었다. 꽃 여러 종류를 단순화해서 그려보라는 선생님의 말에, 하나씩 그리기 시작하는데, 내가 그릴 수 있는 꽃의 종류는 두어종류밖에 되지 않았다. 생각이 나지 않았다. 꽃이 어떻게 생겼더라.
제주에 살며 좋은 점은 사계절 내내 다른 꽃이 핀다는 점이다. 봄이면 유채, 여름엔 수국, 가을엔 코스모스도 있고, 겨울엔 동백. 나는 이 이야기를 꽤 많이 하고 다녔다. 제주에는 꽃이 많아서 좋다고. 동네를 걸어다니며 치자 꽃향기에 홀린듯 따라가 코를 킁킁대기도 하고, 나무에서 진분홍색 꽃이 피는 배롱나무도 좋아했다.
그런데 그들 중 어느 것도 그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좋다고 말하면서 자주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리려니 뭉뚱그려진 모습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충분히 오랫동안, 충분히 가까이에서 보지를 않았던 것. 나는 약간 당황하여, “꽃을 너무 안 보고 살았나봐요.” 하며 머쓱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1년이 넘도록 쓰지 않고 있던 무지 노트가 있었다. 그림 클래스를 다녀온 날, 그 노트를 드디어 꺼냈다. 꼬물꼬물 초딩의 마음으로 눈앞에 보이는 것들, 펜과 노트 같은 것들을 그려보았다. 모든 게 그림의 소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언가를 보는 마음이, 그 대상에 대한 마음이 조금 더 특별해지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좋아하면 잘하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을 잘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잘하지 못해도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리면서 이것에 대해 더 자주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는. 내가 이렇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내 그림을 보는 누군가는 ‘이 정도밖에 못그리면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고?’ 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실은 아무에게서도 이런 말을 들어보진 못했다. (당연히 대놓고 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겠지…) 이런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은 나 자신일 뿐이다. 좋아하는 것에 흠뻑 빠져보면 어때? 못하면서 좋아하면 어때?
엄마는 그림을 정말 오래 그렸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우리 집에 일주일에 한번씩 엄마의 그림 회원들이 그림 그리러 오는 수업 시간이 있었다. 문화센터에서도 20년이 넘게 강사 생활을 했고, 지금도 계속 그 일을 한다. 내가 중학생 때 엄마는 편입생으로 대학교에 들어가서 미술을 더 배웠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의 그림이 아주 고가에 팔린다거나 매번 수상을 한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엄마가 좋아하는 일을 20년이고 30년이고 계속 하고 있을 뿐이다.
엄마의 수강생들 역시 엄마와 비슷한 나이대의 중년 분들이 대부분이다. 얼마 전에 엄마의 회원이 전시를 하는데 포스터를 주문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내용을 포스터에 담아 인쇄를 주문했다. 엄마가 보내준 회원의 그림은 어떤 기준에서는 썩 잘 그렸다거나, 아주 대단한 화가다 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전시 장소는 갤러리가 아닌 교회였다. 그러니까 굳이 미술 전문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지 않아도, 그 분은 충분히 전시를 열 수 있을 만큼의 그림을 그린 것이고, 전업 화가는 아니지만 그리는 것이 좋아서 따로 시간 내어 그림을 그리고 그것들을 쌓아온 것이다.
이런 아마추어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어딘가 뭉클해지기도 한다. 너무 전문가는 나와는 상관없는 세상이다. 그것에 기준을 맞추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초라하고 형편없게 느껴지기만 할 뿐이다. 그에 반해 좋아하는 마음이 듬뿍 느껴지는 사람이나 작품을 보면, 나도 더 해보고 싶은 마음이 인다. 잘하고 인정받는 게 아니라 그냥 좋아하는 마음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싶다.
클래스가 없는 날에도 이것저것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켄트지 묶음을 샀다. 클래스에서 그릴 때 이렇게 종이 한 장에 그림 하나씩을 그려내다 보니, 연습이 아니라 뭔가 완성하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그래서 나도 스케치북이 아니라 종이로 여러 장을 준비했다. 완성하고 나면, 내가 처음에 구상했던 것과 무척이나 다른 느낌의 그림이 내 앞에 놓여있을 때가 많다. 당연하다. 내가 그림을 얼마나 그려봤다고? 그렇지만 오늘의 그림은 이정도로 마치고, 다음에 잘하자를 외치며 또 새로운 종이를 꺼낸다. 흰 종이가 무한히 남아있다.
- 기분 좋아지는 그림과 소품이 있는, 일러스트레이터의 작업실
- 제주에서 미술 재료를 구할 수 있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