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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교 Oct 05. 2024

일상의 템포 조절이 필요할 때

<애호가의 삶> (2) 차의 시간

저녁을 먹으러 갔던 한식집은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곳이었다. 벽에는 서예가 걸려있고, 테이블은 좌식이다. 계산을 하는 곳 앞에는 보이차들이 전시되어있다. 그곳에서는 식사 메뉴와 차를 팔았다. 밥을 다 먹고 나는 보이차를 한 번 주문해봤다. 커다란 차판에 귀여운 자사호, 찻잔이 따로 나오고, 물을 더 부어서 마실 수 있도록 보온병에 뜨거운 물이 같이 나왔다.


차의 세계에 흥미를 갖게 된 건 차 그 자체보다는 차를 마시기 위한 한 판의 세팅이었다. 손바닥만한 미니 주전자 같이 생긴 자사호 안에 찻잎이 들어있다. 자사호에 뜨거운 물을 부어 차를 우리고, 어느정도 우러나면 숙우(식힘그릇)에 따른다. 그리고 작은 찻잔에 조금씩 덜어 마신다.


뜨거운 물을 다관(차 주전자)에 붓고, 찻물을 숙우로, 찻잔으로 따르는 과정. 찻잔에 놓인 차의 냄새를 맡고, 천천히 입에 머금는 과정, 입안에 퍼지는 차의 향과 맛을 천천히 짚어보는 시간. 이렇게 건너건너 음미하는 차의 시간은 느려도 좋고, 충분히 느리면 더 좋다. 내 앞에 놓인 찻자리, 거기에만 집중하며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른다.


자리를 차리고, 기분에 따라 차도구를 고르고, 차를 우린 후 찻물을 따르는 그 모든 과정이 차의 시간이다. 찻물이 이 잔에서 저 잔으로 옮겨지는 몇 초, 몇 분의 시간.


차의 시간을 경험해본 후, 멀리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여기 이곳에만 집중하는 시간이 하루 중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대체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지금 여기가 아니라 다른 데를 신경쓰면서 보낸다. 과거나 미래,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을 신경쓰느라 잡념은 쉬지 않고 여기저기 떠다닌다. 최소한의 온전한 내 시간을 확보하게끔 해주는 차의 시간이 일상의 템포를 조절해준다.




저녁형 인간이던 내가 최근 몇 달부터는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거의 매일 즐기는 모닝 루틴 덕분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뜨거운 물부터 올린다. 세수와 양치를 하고 나오면 그동안 물이 끓어있다. 그리고 어떤 차를 마실지 고른다. (나는 보이차보다는 화사한 우롱차나 달큰한 홍차를 즐기는 편이다.) 차를 골랐으면 그에 어울릴 다구를 고른다. 다구를 많이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 중에서도 매일 다르게 내가 내고 싶은 기분에 따라 고심하여 고른다.


우러난 차와 마음에 드는 찻잔을 챙겨 책상 앞에 앉는다. 따땃한 차 한 모금으로 몸을 깨우고, 1시간 정도 글을 쓴다. 이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자주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두는데, 차 마시기와 글쓰기는 매우 정적인 활동인지라 장면은 거의 매번 비슷하다. 어제가 그제같고, 그제가 오늘같고… 일상은 원래 그런 것 아닌가. 그제같고 어제같고 오늘같은 비슷한 날들의 반복. 그러나 오늘은 어제와 다른 찻잔을 꺼내보는 아주 작은 변주만으로 기분 좋은 하루를 만들어본다. 내일은 내일의 기분에 따라 또 다른 찻잔을 골라야지.


집에서 나는 주로 유리 다구를 사용한다. 진정한 다도 애호가로 거듭나는 순간은 차를 넘어 차도구로 확장되는 순간이 아닐까? 도자기를 만드는 작가들이 만든 고급 다구를 마련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직은 부담스러워하던 차에, 눈여겨 보고 있는 도자기 공방에서 차도구 만들기 클래스가 열린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멋진 도예 작가의 작품도 좋지만, 내가 직접 만드는 다구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클래스를 덜컥 신청했다.


그리고 오늘은 첫 수업을 다녀왔다. 어느덧 쌀쌀해진 가을 날씨에, 선생님이 따뜻한 백차를 한 잔 내어주셨다. 끝에 달큰한 맛이 감도는 백차는 한입 마시고 나면 산뜻한 뒷맛을 남긴다. 

찻잔 두 개를 만들겠다는 나의 욕심이 무색하게도, 작은 찻잔을 하나 만드는 데 90분의 수업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조물조물 흙을 만지며, 완성될 찻잔의 모습을 상상하며 쌓아 올렸다.


이 모든 것을 차의 시간에 포함한다면 어떨까? 흙과 나무로부터 시작된다. 차나무에서 찻잎이 자라고, 그 나뭇잎을 따서 덖고, 흙으로 차도구를 빚어 구워내는 모든 시간. 모든 게 빨리 생기고 사라져버리는 요즘, 한방에 눈길을 사로잡지 않으면 뒤쳐질까봐 조급한 요즘에 차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선선한 어느 봄날에는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담고 간단한 차도구, 찻잎을 챙겨 절물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하늘까지 솟은 삼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다. 평상 하나에 자리를 잡고 찻자리를 펼쳤다.

집에서 마시던 것과 같은 차를 가져왔는데도 숲에서 마시는 차는 훨씬 달게 느껴졌다. 값 나가는 고급 차는 아니지만, 내가 마신 차 중에서는 가장 맛있는 차로 기억하게 됐다.


바쁘고 조급해질수록 더더욱 차를 마시는 시간을 챙겨야 한다. 차 덕분에 나는 내 시간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따뜻한 차를 한모금씩 머금을 때마다 모든게 차분해진다. 내 몸과 마음뿐 아니라 주변도 함께 고요해진다. 아직 맛보지 못한 차가 너무 많아서, 그 큰 세계를 새롭게 만날 생각에 설렌다. 취향찾기를 넘어, 온전한 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만든 차생활.


오늘은 차판을 옆에 두고 책을 읽었다. 그다지 재미있는 책은 아니었지만, 옆에 놓인 차를 홀짝이며 눈으로는 책을 읽는 이 순간에 내가 있음을 느리게 감각한다. 나의 하루를 정돈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차가 가진 제일의 효능 같다.

양다솔 작가는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에서 자신이 일상에서 가장 포기못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다도의 시간이라고 했다. 그 시간과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나도 알 것 같다.




PLACE

- 사장님의 감각과 취향이 듬뿍 묻어있는 티하우스

- 맑은 날씨에 차크닉 떠나기 좋은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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