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호가의 삶> (3) 기록
회사를 다닐 때, 멋진 분과 협업을 할 기회가 있었다. K님과 둘이 앉아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나누며 기획의 방향을 잡았다. K님은 노트와 만년필을 꺼냈다. 보통은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옆에 나란히 앉아달라고 했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K님은 만년필로 자유롭게 노트 위를 휘저었다. 그 날의 회의 내용보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건 그가 쓰던 만년필이었다. 후배에게 선물받았다는 노란색 라미 만년필.
며칠 동안 아른거리던 만년필을 주문했다. 나는 빨간색 라미 사파리 만년필. 만년필 입문자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만년필 중 하나다. 모던한 디자인에, 글씨를 쓸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힘을 빼고 써도 잉크가 콸콸 나온다.
펜이 생겼으니 노트가 필요하다. 쓰지 않은 새 노트가 여러권 있었다. 종이가 튼튼한 노트를 꺼내 만년필로 아무 말이나 썼다. 종이에 잉크를 흘리는 느낌이 좋아서 계속해서 종이에 무언가를 쓰고 싶어졌다.
2년 전에 2장만 쓰고 넣어두었던 일기장을 꺼냈다. 종이가 얇아서 만년필을 쓸 수 없었다. 연필로 며칠 간 일기를 썼다. 쓰고 싶은 말이 더 많지만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서 길게 쓰기가 어려웠다.
이제 일기장에 페어링 할 펜이 필요했다. 유튜브와 블로그를 찾아보니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펜이 몇가지로 추려졌고, 그 중 하나인 빠이롯드 주스업 펜을 구매했다.
새로 산 볼펜은 손에 힘주지 않아도 잉크가 진하게 나오고, 잉크의 끊김이 없어 쭉쭉 글씨를 밀고나갈 수 있었다. 이제 일기를 길게 쓸 수 있게 되었다. 사각거리는 만년필과 달리 부드럽게 종이 위를 미끌미끌 미끄러져다니는 펜의 맛.
몇 달 간 꾸준히 일기장에 일기를 썼고, 마침내 펜 한 자루의 잉크를 끝까지 다 썼다. 이 순간이 가장 뿌듯하다.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 다 써서 나오지 않는 잉크. 뭔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거대한 일을 하나 끝마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만년필이 쏘아올린 작은 공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록 생활로 이어졌다. 만년필로 어떤 글씨든지 더 쓰고 싶어서 필사 노트를 만들었다. 책에서 읽은 좋은 문장들을 손으로 한 번 더 노트에 옮겨 적는다. 한글자씩 꼭꼭 씹어 읽어본다. 눈으로 읽을 때보다 훨씬 깊은 맛이 우러나온다.
여행갈 때는 작은 노트를 한 권 챙겼다. 영수증이나 티백 껍데기, 커피 원두 카드 같은 어찌보면 쓰레기가 될 수 있는 자잘한 쪼가리들을 모아 노트에 붙였다. 그날그날의 일과를 적고 틈틈이 든 생각들을 정리해 적었다. 여행의 일정 중간중간 카페에서, 아침이나 저녁에 숙소에서 노트에 하루를 정리하는 그 시간이 여행을 더 잘 기억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여행 중에는 기록에 더 열심이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특별하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 돌아가면 다 사라져버릴테니까. 언제 다시 이곳에 오게 될 지 모르니까. 지금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여행에서는 매순간 의식한다.
내가 든 생각들을 글로 기록해도 그때의 소리나 풍경은 놓치는 게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영상으로도 기록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시작은 역시 여행에서부터였다. 여행의 소소한 풍경들, 거리에 개가 누워있는 모습이나, 호수공원에서 사람들이 산책하는 풍경 같이 내가 기억하고 싶은 장면들을 영상으로 담았다. 그리고 약간의 편집을 거쳐 유튜브에 올렸다. 조회수가 나오지 않아도, 구독자가 늘지 않아도 괜찮은 나를 위한 기록이었다. 그런데도 공개 동영상으로 올리는 이유는 나와 비슷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을까.
5년 전에 찍어둔 일상 기록 영상이 남아있었다. 두어 편 만들어 올리다가 금세 그만두었던 일상 브이로그였다.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하루하루여서 지금은 전혀 떠올릴 일 없는 장소와 장면들이 그 영상 안에 들어있었다. 인천에서 책방을 할 때 오가던 출퇴근 버스와 지하철, 책방에서 자주 틀어놓고 듣던 노래, 손님이 없어 한가로운 책방의 풍경과 자주 만나던 고양이까지. 그런 건 시간이 지나고 지금 여기를 살면서 꽤 잊고 살았던 것들이다. 영상으로 남겨두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생생하게 다시 볼 수 있었을까?
겁도 없이 아는 것도 없이 자신감과 열정만 가지고 책방을 운영했던 때를 지금은 부끄러워 한다. 서툴렀던 점만, 잘 못한 점만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영상 속에 담긴 그때 그곳의 모습을 보면, 좋았던 감정과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이웃들과 나누는 안부 인사가 있었고, 내가 고른 책을 좋아해 준 단골 친구들도 있었고, 내 취향껏 꾸며 만족해했던 공간이 있었고, 엄마와 동생과 애인과 함께 다듬었던 공간 구석구석이 있었다. 몇 편 없지만 영상으로 기록해두기를 정말 잘했다고, 그 때의 나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잊을 뻔한 것들을 다시 돌려주어서.
기록에도 목표와 목적이 필요하다. 나의 목표는 띄엄띄엄 하더라도 멈추지 않고 계속 하는 것이고, 목적은 나중에 내 역사를 돌아보기 위함이다. 역사라고 말하니 거창한 것 같지만, 내가 기록하지 않으면 누구도 내가 느낀 이 좋음을 알 수 없다. 심지어는 시간이 흐른 뒤의 나조차도 이것들을 잊어버릴 것이다. 잊지 않기 위해서, 다시 떠올리기 위해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연결하고 미래의 나로 이어가기 위해서 충실히 기록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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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거 아닌 일상을 모아두는 영상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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