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사 템플스테이 (2) | 2018. 1. 2. 화요일
아침 먹으면서 현종스님을 처음 뵈었다. 인사도 드리고 후식으로 스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드립커피도 한 잔 받아마셨다. 생각지도 못한 커피를 마실 수 있어서 심봤다 싶은 심정이었다. 절과 드립커피. 어딘가 이질적이지만 뭐든 좋았다. 사발커피를 한 사발 들이켜고 나니 속이 쓰려왔지만...
양치하고서 절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새소리도 듣고 나무도 살펴보고 강아지하고 인사도 하면서 노닥거리다가 스님과 등산을 다녀왔다.
포행이라고 하셔서 근처로 산책가는 줄 알았는데, 소금강으로 간다고 하셔서 강가로 가는 줄 알았는데, 小금강산이었다.
산이 높거나 험하진 않아서 갈만했으니 다행이다.
몇 주 전부터 상태가 온전치 못한 나의 핸드폰은 역시나 등산 5분만에 전원이 나갔다. 필름카메라를 챙겨간 덕에 다행히 풍경을 담을 수 있었다.
핸드폰 하나 없을 뿐인데 사진 찍는 것도 신중해지고, 시간도 알 수 없고, 혹시나 응급상황이 생길지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협곡 사이로 가면서 마주치는 풍광은 이국적이었다. 이국적인 동시에 동양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계곡은 얼어있었다. 스님은 멀쩡한 길을 두고 굳이 얼음으로 가고싶다고 하셔서 나까지 언 계곡 위로 걸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모두가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는 것이라며 나의 예정된 죽음에 매우 초연하고 여한이 없는 듯 했으나,
'지금 핸드폰 배터리도 없는데 물에 빠지면 이 겨울날 외진 산에서 생을 마감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장 처음 한 나를 보며 죽음에 있어 1도, 0.1도 초연하지 않음을 보았고.
다행히 얼음은 깨지거나 녹지 않았고 나는 살아남아 이렇게 평화롭다.
계곡 바위에 앉아 명상하는 설정샷도 찍고, 내려오는 길엔 금강사라는 절에 들러 차도 한 잔 얻어마셨다.
절로 돌아와 한시간쯤 쉬다보니 어느덧 점심 공양 시간.
하루를 이렇게나 알차게 쓸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산까지 올라갔다 내려왔는데도 아직 오전이라는 것이.
매일 이렇게 살고 싶다. 시계 없이 해 뜰 때 일어나서 밥먹고 동물과 식물과 놀다가 자연을 걷다가.
밥먹고 들어와 조금 잠들었는데 스님이 차마시러 오라고 전화하셔서 차 마시러 갔다.
처음보는 언니도 있었다. 템플스테이를 시작으로 스님과 연이 되어 자주 뵙는다고 했다.
스님은 거칠고 쿨한 말투를 갖고 계시는데(게다가 경상도 사투리를 써서 더 세게 들린다) 굉장히 열려있는 분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여행도 좋아해서 많이 다녔다고 하셨다.
언젠가 글을 써서 책을 만들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현덕사 이야기 꼭 쓰라고 하셨다. 스님이랑 소금강 포행도 다녀오고 너무 좋았다고, 그런 내용으로다가. (그런데 다녀온 지 1년이나 지나서 쓰네요...)
대왕 홍시도 챙겨주셨다. 방에 가서 후루룩찹찹 흘리며 먹었다. 책 좀 보다가 쉬다가 홍시도 먹다가.
그러다보니 저녁 공양 시간. 밥시간이 빨리빨리 돌아와서 하루 일정이 빡빡하다.
가져온 책들 3권이나 되는데 1권도 제대로 못끝냈고
노곤노곤하니 또 머리만 대면 잠에 스르륵.
더 길게 쉬다가 가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