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군 소수면의 여름 2
괴산은 한자로 느티나무 괴 자와 뫼 산자를 쓴다. 어릴 때는 괴이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 괴물이 많아 괴산인가도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댁은 앞 동네 양지말보다 해가 일찍 지고 동네를 빙 둘러 모두 산이 가로막았기 때문에 괴물이 나타나기 좋았기 때문이다.
"시집와서 처음 한 두 해는 해지는 걸 보면서 밥 하다가 울고, 밭에서 김매다가도 몰래 울었지. 목도에 살 때만 해도 강이 커서 저녁이면 동무들이랑 노박 멱을 감았는디 여 오니까 그것도 못하고 개울이라고 또랑같이 있으니 가당키나 허냐. 어무니를 보러 갈라치면 앞 산이 턱 하고 가로막고, 뒤를 돌면 뒷 산이 버티고 서 있으니 울화가 나 그게 힘들었지."
대학교 3학년, 4학년 여름 방학 때 세 달 가까이 괴산 할머니댁에 들어가 살았다. 명목은 임용 고시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친구 좋아하고 놀기 좋아해서 도저히 청주 집에서는 공부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할머니댁은 컴퓨터도 없고 인터넷도 안되니 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두어 해 되셨고 할머니께서는 퍽 외로워하셨다. 제일 많이 하신 말씀은 혼자 있으니까 입맛도 없고 밥 한 솥 해두고 종일도 먹고 이틀도 먹는데 니가 오니까 밥맛이 좋다는 말씀이었다. 나도 잔소리도 안 하시고 밥도 꿀같이 맛있는 할머니댁이 좋았다.
할머니는 텃밭 농사도 지으시고 읍내로 병원도 다니시고 동네 마실도 이따금 가셨다. 동네 어른들이 모두 나이를 잡수시면서 논은 진작에 다른 곳에 도지를 주고, 밭뙈기만 경작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나는 거실에 큰 교자상을 펴고 책을 여러 개 어질러 놓으며 반드시 완독 하겠다고 마음먹은 개론서 세 권을 붙들어 잡았다. 저녁에는 할머니와 산책도 가고 할머니 밥하실 때 옆에서 거들면서 이런저런 얘기도 많이 했다. 주로 할머니의 이야기를 옛날이야기 감상하듯 들었다.
"그때 느이 할아버지 군대 다녀오고 우리 어무니 생신이셔서 다니러 가고 싶었는데, 느이 할아버지가 들큰도 안 하더라. 내가 시집오고 처음 친정가는 거니까 다녀오고 싶다고 했는데, 버스비도 안주더라. 어쩔 수 없이 큰 이모를 업고 울면서 고개를 넘고 걸어서 목도까지 간 거지. 빈 손으로 친정에 가 얼마나 염치없고 죄송했는지 몰라."
"곳간 열쇠는 할머니가 쥐고 계셨지. 나는 돈 쓸 줄도 모르고 그냥 소같이 일만 했어. 세상 서럽고 하루에도 열두 번 까무러치고 싶었지만 엄마 생각해서 참았지. 새북에 일어나서 도시락 열 개를 싸고 일꾼들 밥을 하고 밭에 김매고 돌아와서 또 밥하고 젖물리고 나가서 또 일하고 그러다 보면 밤이 되고 바느질하고 옷 만들어 입히고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세월이 벌써 이렇게 흘러가서 이렇게 좋은 세상이 되었디만 내 몸은 이렇게 쭈그렁 망탱이가 되어서 육신에 병만 들었구나."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괴산 목도의 큰 강가 시장 안에서 태어나셨다. 할머니의 아버지께서는 혈혈단신 고생 끝에 늦장가를 가셨기 때문에 가족을 귀중히 여기셨다고 한다. 부모님, 언니들, 남동생 단출한 식구들 속에 살다가 천주교 집안끼리만 부부의 연을 맺던 당시의 풍습에 따라 괴산 소수의 산골짜기로 시집오셨다. 열아홉에 육이오 전쟁을 겪고 이태가 지나 스물 하나라고 하셨다.
내가 아는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남편이자 우리 엄마의 아버지인 할아버지는 사뭇 다른 사람이었다. 우리 셋에게는 한없이 다정하신 분이었는데,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들어보면 세상 인정 없으신 분이었다.
"내가 큰 이모를 낳고 겨울에 추워서 장작을 팰라고 하니까 너희 할아버지가 장작을 대신 패주었지. 그랬디얀 시어무니께서 남자가 장작이나 패고 앉아 있다고 눈총을 주시더란다. 그 길로 다시는 애 낳고도 할아버지가 뭘 안 도와줬어. 그래도 너희 엄마랑 이모들 어릴 때 장난도 곧잘 치고 겨울밤이면 꼭 손톱 발톱도 깎아주고 정이 많은 분이었지."
"우리 시어머니는 말이 없는 분이었지. 아버니께서 첫 부인을 잃고 늦장가를 가신 거라 아주 귀하게 떠받드셨다. 밭일도 하나도 안 시키고 집에서 애 키우고 밥만 하셨지. 그러다 내가 들어와서는 붴에 출입을 딱 끊으셨지. 그래도 딸 여섯 낳는다고 구린 입 한번 안 띠신 분이다. 너희 엄마 봐라, 할머니라면 그저 떠받들고 너희 엄마가 할머니 정을 받아서 할머니한테 참 잘했다. 딱 한번 밥을 해주셨는데, 그때 다섯째 또 딸 낳고 내가 눈이 칙칙해지도록 울고 안 일어나니까 호박죽을 끓여서 주시더라. 너도 애 낳고 울면 안디야. 눈 배린다."
"나는 애들이 어떻게 컸는지도 모르고, 너희 엄마가 어땠는지도 모르고, 그냥 살았다. 그냥 닭 울면 일어나 밥하고 들에 나가 일하고, 밭에 나가 김매고. 때 되면 들어와 밥하고. 그렇게 살다 보니 세상이 이렇게 좋아졌는데 내 무릎은 다 녹아내리고 병이 들어서 이렇게나 아프니 살 수가 있겠니."
생각해 보니 어릴 적 할아버지와 신나게 놀았던 기억은 가득해도 할머니와는 특별한 추억이 없었는데, 성인이 되어 할머니 곁에서 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고단한 삶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할머니는 그저 황소처럼 어린 시동생들을 밥해먹이고 시부모님을 봉양하고 아이를 여덟이나 낳았다. 그러다 보니 무릎은 병이 들었고, 이제는 시골집에서 혼자 살게 되셨다.
나는 두 해 여름을 할머니와 함께 보내며 할머니의 말씀을 많이 들었다. 어릴 적 일본 순사를 피해 목도 시장 바닥에서 동무들과 쏘다니던 말씀을 하시거나 아이가 없던 '새닥 시절'에 동네 부인네들과 널뛰기도 하고 윷도 놀던 시절 말씀을 하실 때면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볼이 발그레해져 생기가 도셨다.
할머니 곁에서 애호박에 새우젓 넣고 찌개 끓이는 법도 배우고 간장을 끓여 식힌 다음 일일이 깻잎에 한 장씩 바르는 반찬을 만드는 것을 하루 종일 지켜보기도 했다. 배추밭에 모종을 심던 날 달구지에 물을 넣고 몇 번이나 실어 나르며 배추싹이 타 죽지 말라고 물을 주는 것도 도왔다. 이따금 심심하면 빈 성당에 들어가 선풍기를 틀어놓고 고장 난 풍금을 연주해보기도 했다. 끽해야 다장조 음계에 느린 리듬의 성가밖에 칠 줄 몰랐지만 제법 진지하게 건반을 눌렀다. 그 시간 덕분에 호박잎이 뭔지, 고구마 순이 뭔지, 가지 꽃은 어떻게 생겼는지 조금은 구분하는 도시 촌놈이 되었다고 자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