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군 소수면의 가을
깍쟁이 영어 선생님께 배울 때다. 영어 학원 원장 선생님의 이대 다니는 예쁜 따님이었다. 독일에서 태어난 그 선생님은 독일어도, 영어도 잘하지만 일본어까지 잘하는 분이었다.
"니네 청주 사투리가 뭔지 아니?"
"영어로 Long 을 한국어로 한번 말해봐~"
"낄-다 이렇게 말하는 게 청주 사투리더라고. 서울 친구들한테 길-다고 안 하고 낄-다고 했다가 애들이 얼마나 웃었는지."
그날 저녁 집에 와서 가족들에게 물어봤더니 모두 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사촌 언니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 모두 괴산이 고향이고 이모, 고모, 삼촌 할 것이 모두 괴산에서 나고 자랐는데, 그렇다면 어쩌면 청주 사투리는 괴산 사투리일지 모른다, 나혼자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학교에서 '이촌향도 현상'을 배울 때는 부모님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웠다. 아성리 낡은 터의 아들 둘 딸 넷과 고마리 3구의 딸 여섯, 아들 하나 중 괴산에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아빠의 부모님께서는 환갑이 되시기 전 터전일랑 두고 청주 큰 아들네 집으로 들어오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25년 가까이 청주에서 지내셨다. 엄마의 부모님께서는 괴산에서 오랫동안 농사를 지으셨다.
1994년 괴산 할아버지가 환갑잔치를 여는 해가 되신 김에 장성한 자식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시골집을 조립식 집으로 새로 짓게 되었다. 시멘트로 터를 돋우고 그 위에 방 세 칸에 수세식 화장실이 딸린 근사한 집이었다. 엄마와 이모들은 새 집 마당에서 동네잔치를 벌이느라 가마솥 두 개를 연신 펄펄 끓이고, 병풍을 두르고, 사과를 깎고, 전을 부쳤다. 광에 몰래 드나들며 먹지 말라는 약과니 유과니 집어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추석 무렵 가을밤의 멋진 추억은 사촌 오빠들이 함께 한다. 다정다감한 제일 큰 오빠와는 아직도 친하게 지내지만 다른 오빠들은 어쩐지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래도 어릴 적에는 큰 방에서 다 같이 명절 특선 영화를 보다가 잠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둘째 이모의 두 아들은 모두 이름이 외자다. 세상에 이름이 두 글자인 사람이 둘이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모는 내가 좀 사근사근하게 굴면 오빠들이 친절하게 잘해줄 거라고 했지만 나는 어쩐지 그 말에 약이 올라서 더 대들고 말았다. 그래도 오빠들은 짓궂은 장난을 할 때면 나를 끼워주었다.
어른들이 거나하게 술에 취하고 한창 웃고 떠들 무렵에 낮에 미리 할아버지 몰래 빼돌린 짚단과 성냥을 들고 성당 마당으로 간다. 성당 마당의 절반은 시멘트고 나머지 절반은 흙바닥인데 오빠들은 후레시를 켜고 흙바닥에서 지푸라기를 펼쳤다. 그리고 거기에 감자니 고구마니 넣고 불을 지폈다. 할아버지는 이놈들 하면서 오시고 짚을 더 가져가지 말라고만 하시지 불을 끄진 않으셨다. 감자도 고구마도 좋아하진 않지만 몰래 후레시를 켜고 불장난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할아버지는 이튿날 성당 마당에 재가 남았다며 오빠들을 나무라셨지만 그 후에도 두세 번은 더 불장난을 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정말 못 말리는 손주들이었다.
추석 때 결혼한 딸들 중 제일 먼저 와서 제일 늦게 가는 것은 당연히 우리 집이었다. 명절 첫날엔 청주 할머니댁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튿날 새벽같이 괴산 낡은 터 큰할머니댁으로 가서 연도를 바치고 떡국을 먹는다. 그다음엔 괴산 읍내 성당으로 가서 명절 미사를 드리고 마당을 기웃거리며 '우리 할아버지'를 찾는다. 할아버지는 감색 두루마기를 입고 옅은 분홍색 한복 바지를 입으셨기 때문에 금방 찾을 수 있다.
"느이 언제 올 거냐 시렁에 약과랑 부침개랑 다 뒀으니까 다른 애들이 와서 먹기 전에 얼른 오너라."
어떨 때는 미사 끝나고 바로 옆옆 동네 할아버지께 갈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성묘를 하러 산에 갈 때도 있었지만 늦은 점심 전에는 기어코 당도했다. 도착하자마자 부리나케 절을 올리고 뭘 맡겨놓은 애들처럼 다섯째 이모와 할머니께 먹을 걸 달라고 하였다. 말씀은 그렇게 하셨어도 할머니는 항상 우리 몫을 남겨두었다.
"그 집 애들 넷은 다들 제사를 지내는 집이니께로 평시에도 즈그네 집에서 전이니 꼬치니 얻어 묵는 애덜이고, 너네는 제사를 지차라 제사를 안지내니께로 입에 기름칠을 못할 거 아니여. 그래서 산적이랑 꼬치랑 다 집어먹기 전에 니네 꺼를 따로 빼놓는 거지."
서른이 넘고 애를 낳아서야 할머니께 듣게 된 이유였다.
우리 셋은 맛있는 음식을 배가 터질 때까지 먹고 다음 날 주말이 꼈다면 그다음 날까지 괴산 할머니댁에서 비비며 송편도 더 빚고 만두도 만들어 먹었다. 사춘기가 빨리 온 나는 고등학교에 가면서부터 할머니댁에 잘 가지 않게 되었지만 남동생은 지금도 명절이면 하루 이틀 더 머물며 좋아하는 산적도 실컷 먹고 만두도 신나게 빚는 듯하다.
밤에는 불장난을 하고 낮엔 동네 어귀의 밤나무에서 밤을 까며 신나게 놀았던 추억으로 가득한 추석. 하지만 추석 하면 꼭 떠오르는 사건은 1996년에 일어났다. 여느 때처럼 큰 이모, 작은 이모네는 모두 일찍 물러가고 우리 집과 결혼 안 한 이모들만 남았다. 옆 집 꼬마네들도 다 어디를 갔는지 비고 나는 어쩐지 자꾸 옆집 애들이 타는 자전거에 시선이 갔다. 이미 1994년에 청주 할머니댁에서 자전거를 타다 이마를 찢어먹어 아직까지 흉이 크게 남았지만 정신을 못 차리긴 매한가지였다. 마침 지난여름에 두 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워둔 터였다. 동생들은 왜 남의 자전거를 허락도 없이 타냐고 떨떠름해하고 말렸지만 동생들 말을 들을 내가 아니었다. 묶어둔 자전거도 아니니 몰래 타고 잘 가져다 두면 되지 않은가 싶었다.
할머니댁 동네는 천주교 박해를 피해서 산골짜기 안쪽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마을이 약간 높은 언덕에 위치했다. 그래서 마을 진입로는 다소 경사가 져 있는 편이다. 못된 송아지 같은 내 눈에는 그 길이 환상적인 미끄럼틀로 비쳤다. 언덕 꼭대기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밤나무 가까이 선 채로 손잡이를 꽉 움켜쥔다. 발은 이미 페달을 구를 준비가 되었다. 신나게 내리막길로 내달리다 보면 T자 모양으로 시골 국도가 가로지른다. 추석이어서 버스도, 다니는 차들도 없고 하늘에 한적한 잠자리만 가득하다. 나는 기분이 들떠 고추밭에서 일하는 엄마 아빠에게 부러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이윽고 도로에 자동차가 번개 같이 지나갔고 나는 순간 브레이크를 밟을 틈도 없이 그대로 자동차를 들이받았다. 다행히 자전거가 먼저 사이드 브레이크 쪽으로 부딪혔고 20킬로가 안되었던 내 가벼운 몸이 하늘로 붕~떠올랐다. 그 와중에 일곱 살 때 머리를 다쳤던 것이 생각이 나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떨어졌고, 자동차는 끼이이이이익 굉음을 내며 간신히 논두렁에 빠지기 직전에 멈추었다.
바닥에 납죽 엎드려 뺑소니인가 죽은 건가 살은 건가 생각하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듯 자동차에서 내려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아뿔싸, 막내 이모였다. 나는 그 와중에 어처구니가 없게도 괜찮으니까 엄마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때 너 말야, 진짜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친구가 면허 따고 차 샀다고 해서 둘이 드라이브 겸 돌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서 니가 튀어나와 가지고, 심장 멎는 줄 알았어 야. 너 하늘로 붕 뜨지, 차는 안 멈추지, 논두렁에 꼬라박히기라도 했으면 아으 정말. 하여튼 셋째 언니가 너 혼낼 때 좀 너무하다고 생각했는데 너도 진짜 사고 많이 치긴 했어."
명절이라 여는 병원이 없어 겨우겨우 수소문하여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왼쪽 발목에 타박상이라고 하셨다. 천운이었다. 엄마는 후유증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꼬박 두 달 동안 저녁마다 뜨거운 물로 내 발목을 문질러 주셨다. 그때 갓 스물서넛이었던 막내 이모는 한동안 운전면허도 딸 수 없을 만큼 놀랐다고 했다. 부모님은 옆 집에 자전거 값을 물어주셨고 백배 사죄하셨다. 나도 따로 옆 집에 사과 전화를 드렸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엄마는 나를 혼내지 않았다.
"언니 그때 진짜 이해 안 됐어. 왜 남의 집 자전거를 타지? 간도 크다 참. 그러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또 옆 집 오빠들이랑 놀았잖아. 뻔뻔한 건지 용감한 건지 난 항상 언니가 사고 칠까 봐 조마조마했다니깐?"
"맞아, 나도 그때 누나 진짜 왜 그러는지 어이가 없었다. 그러고 나서도 자전거 계속 타잖아? 안 무섭냐?"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한 마음보다 옆 집 자전거를 훔쳐 탄 것이 더 먼저 떠올라 부끄럽다. 하지만 단순한 건지 멍청한 건지 나는 계속해서 자전거를 탔고 스무 살 때는 아예 자전거를 타고 대학을 통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