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날씨 어때요 6

괴산군 소수면의 여름 1

by 지진진

가르치던 학생이 '갓파쿠와 여름방학'이라는 일본 애니매이션 파일을 USB에 담아 왔다. 어린이 애니매이션이라고 하기엔 어른의 마음을 더 건드리는 무엇인가 있었다. '너의 이름은'도 그렇고 일본 애니매이션이나 만화 중 유독 여름방학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많구나 느꼈다. 무덥고 습하고 푹푹 찌는 여름이지만, 그 여름에만 가능한 공기의 느낌, 긴 여름 하루를 보내는 공간의 풍경들이 특유의 사건과 감성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고 혼자 짐작해본다.


당연히 나에게 여름방학은 고마리다. 맏며느리로 챙겨야할 제사와 시댁 식구들이 빼곡한 큰 이모, 둘째 이모와 달리 '지차'한테 시집간 셋째, 우리 엄마가 제일 자주 친정댁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갈 수 있는 것과 가기 쉬운 것은 좀 다르다. 엄마는 아이 셋을 데리고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탔다.


그때는 청주 시외버스 터미널이 사직동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 그 자리에는 38층이 넘는 주상복합 아파트 두 동이 들어서서 청주의 사우론 같이 버티고 있다. 집에서 거기까지 겨우 간 다음 괴산에 가는 시외 버스를 타면 어김없이 셋 중 하나가 돌아가며 멀미를 하고 토를 쏟아냈다. 기사님은 눈살을 찌푸리고, 버스에 타던 승객들도 한마디씩 보탰다. 엄마는 연신 굽신거리며 봉지를 묶고 토를 쓸어담았다.


"아줌마, 미련하게 애를 왜 셋이나 낳았어~"

"아줌마, 애가 셋이나 되면 버스를 타고 다니면 안되지 참나"


하지만 아빠와 동승했을 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른이 되어 혼자서 괴산 할머니댁을 가는데 내가 사는 율량동 정류소에서 터미널까지 채 40분도 되지 않았다. 그 사이 도로 사정도 좋아지고 여러가지가 좋아졌겠지만 어릴 때는 그 시간이 정말 버티기 힘들었다.


터미널에 도착하면 풀풀 흙먼지가 날리고 터미널 한 가운데 공중 변소에서 풍기는 뜨거운 소변 냄새와 역겨운 바람이 풍겼다. 허리춤의 벨트를 적당히 풀고 단추를 두 세개 젖힌 기사님들이 바가지로 물을 촥 뿌리는 소리, 청주의 자식들에게 보낼 각종 푸성귀들을 바구니에 이고 지고 터미널로 나오는 할머니들의 목소리, 버스가 정차하거나 출발할 때 내는 특유의 가스 빠지는 소리 들이 모두 도착을 알려주었다. 거기까지 오면 이제 거의 살았다고 보면 된다. 이제 괴산 읍내 사거리로 걸어나가 시계탑 쪽을 지나 할머니댁으로 가는 시내 버스만 타면 되는 것이다.


정류장에서 기다리다 보면 이윽고 엄마에게 아는 체하는 어른들이 나타난다. 1991년 겨울 딱 3주 있었을 뿐인데 나를 알아보시는 어른들도 계시다. 엄마는 애들 방학이라 다니러 왔다며 요새 누가 입원하셨는지, 누구네 집 몇째 딸이 아이를 낳았는지, 누구네가 논을 팔고 대신 축사를 지었다던지 하는 소식을 부지런히 나눈다. 그러면 멀미는 깨끗하게 가시고 기분이 좋아진다. 사람들은 다같이 명덕, 옥현이 쓰여진 마을 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괴산 읍내를 지나 좌회전을 한다. 그리고 이제 왕복 이차선 도로를 곧게 달린다. 아빠가 태어난 마을이 먼저 나온다. 그 마을이 아빠와 우리셋의 본적이다. 마치 내 딸의 본적이 남편과 시누이의 본적과 같듯이. 그 마을을 낡은터라고도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우리는 조금 더 지나 산 모로이 두 세 개를 더 돌아 드디어 할머니댁에 도착한다. 할머니가 우리를 마중나와 계신다. 할아버지는 대낮부터 벌게진 얼굴로 왔냐고 하신다. 옆집에는 우리 또래 머스마 둘이 살고 있다. 시간이 맞으면 같이 놀 수도 있고, 안 놀 수도 있지만 일단 시원한 식혜부터 한 잔 마신다. 수박도 좋고 참외도 좋다. 먹을 것은 널려 있고 벽돌로 새로 지은 성당 마당으로 나가면 온갖 풀과 느티나무, 매미, 여치가 반긴다.


겁도 없이 성당 마당 땡삐 한 가운데로 나온 여치는 우리 셋에게 잡힌다. 할아버지 몰래 가지고 나온 성냥을 그슬려 여치 엉덩이에 갖다 대면 여치가 똥을 누듯이 흰 기생충을 눈다. 좀 가지고 놀다 심심해지면 외양간 앞에 말뚝을 박아놓고 아무렇게나 키우는 검정개 약돌이를 데리고 나간다. 개를 무서워 하는 나를 두고 동생들이 나가버리면 난 할아버지를 찾아 귀찮게 군다. 할아버지는 소 꼴도 베어 먹이고 논에 김도 매시느라 지게를 짊어지고 바쁘시지만 볕이 뜨거운 점심 무렵에는 날 무릎에 앉히신다.


큰 이모, 둘째 이모 모두 아들만 둘을 낳았다. 그리고 우리 엄마가 드디어 딸을 낳았다. 할아버지에게는 외손녀든지 친손녀든지 어쨌든 내가 첫 손녀였다. 할아버지는 다섯살이던 나를 성당 마당 느티나무 그늘로 데리고 가서 개미도 잡아주고 놀아주면서 일본말을 몇 마디 가르쳐 주셨다.


"할아버지는 오지-상, 할머니는 오박-상, 엄마는 오카아---상인겨, 남동생은 오도--상. 따라해봐. 옳지, 그렇지. 똑똑한 우리 손자딸. 아이고 기특하다."


나는 낯선 일본말도 할 줄 아는 할아버지가 가장 똑똑한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찾아뵐 때마다 이때 가르쳐주신 일본말을 매번 확인하셨다. 그때마다 박수를 치며 한번 가르쳐주었는데 까먹지도 않는다고 아주 똑똑하다고 칭찬해주셨다. 나는 그 칭찬이 너무 좋아서, 너무 고파서 절대 할아버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 일본말 시간은 오빠들에게도 내 동생들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나만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괴산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 정말 많은 여름을 보냈다. 하지만 가장 잊혀지지 않는 여름은 1995년이었다. 그 해는 특히 북한에서 큰 대홍수가 나 많은 이재민이 발생한 해였다. 한낮에 나는 혼자서 매미 허물도 줍고 봉숭아꽃잎도 따면서 휘적 휘적 놀다가 성당 느티나무에 올라갔다. 그 느티나무는 우리 엄마가 어릴 때도 있던 나무라고 했다. 굵은 줄기가 갈라져 나가는 부근이 어린아이가 두엇이 앉을 수 있을 만큼 꽤 넉넉했다. 나는 동네 어른이 느티나무 잔가지를 치기 위해 인근에 두었던 손도끼를 가지고 놀았다. 나는 그날 손도끼를 나무 둥치에 곱게 두고 나무를 내려왔다. 그날 밤 하늘이 깨질 것 같이 큰 비가 쏟아지고 천둥 벼락이 쳤다. 이윽고 창밖으로 불이 번쩍 하면서 땅이 쪼개지고 집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아침이 되어 보니 느티나무가 몸의 절반을 잃고 겨우 살아 남았다. 동네 어른들이 모두 나가 온 종일 나무의 반쪽을 치우고 도끼질을 하여 땔감으로 바꾸는 동안 나는 어쩔 줄을 몰라 성당에 들어가 하느님께 잘못을 빌며 울었다. 나중에 엄마께 말씀드렸더니 어른들이 거기에서 무슨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고 내 잘못이 아닐거라고 하셨다. 나무는 그 후로도 십오년 가까이 더 그 자리에 있다가 어느 날 사라졌다.


지금 와 생각해보니 부모님께서는 농삿일을 도와드리려고 가셨던 것 같다. 괴산군 초입에는 우람한 임꺽정 합성수지 플라스틱 모형이 거대한 붉은 고추를 들고 있다. 할머니댁에서도 괴산의 특산물 고추 농사를 당연히 지으셨다. 그 고추란 것이 여러 번 수확을 해야 하는데 제일 더울 때가 바로 그 때라서 부모님께서는 종종 괴산에 와서 고추 농사를 도우셨다.


그날은 외양간 사이 대문깐 초입에 생긴 그늘에 커다란 비니루를 깔아두고 아빠가 경운기로 옥수수를 우르르 쏟아냈다. 넷이나 되는 '사우'들 중 경운기를 몰 줄 아는 사람은 우리 아빠뿐이었다. 할머니는 셋째 사우 '지소방'이 좋아한다며 개를 잡게 되면 꼭 미리 연락을 하셨다. 아빠는 그 전화를 받으면 냉큼 괴산으로 갔고 경운기를 몰고 비료도 주고 옥수수밭에 가서 옥수수도 실어오셨던 것이다.


할머니와 엄마는 동네 아주머니와 함께 신나게 이야기를 하면서 옥수수 껍질을 벗겼고 우리 셋은 김장할 때 배추를 씻는 거대한 고무 다라이에 물을 받고 신나게 놀았다. 할머니 댁 마당엔 작은 샘이 있어서 동네 분들 모두 성당 바로 앞 할머니 댁을 지나가면서 그 샘에서 손도 씻고 목도 축이고 빨래도 하셨다. 엄마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그 샘은 제법 그럴듯한 수도꼭지를 달고 시멘트를 발라 정돈이 되었다. 그 수도꼭지에 푸르스름한 긴 호스를 꼭 끼우고 고무 다라이에 물을 받으면 얼음장같은 샘물이 더위를 식혀 주었다. 물방울이 튀고 무지개가 뜨도록 마당에서 물을 뿌리고 놀았다. 할머니는 이따금 이놈들아 빨랫줄에 이불 피해서 놀아라 소리를 치셨다.


할아버지는 소 꼴이 가득찬 지게를 내려놓고 허리를 피신 다음 손짓으로 나만 부르셨다. 나는 댐박 눈치를 채고 할아버지를 따라 옆집 대문깐까지 따라갔다. 할아버지는 호박잎을 보여주면서 몇 개 안되니 동생들 주지 말고 나만 혼자 먹으라고 말씀하시곤 얼른 가버리셨다. 호박잎을 조심스럽게 열어보니 그 안에 새빨갛게 익어 터질 것 같은 구슬이 들어 있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느티나무 그늘로 가서 산딸기를 한 입에 털어넣고 한참을 우물거렸다.


외벌이에 바쁜 아빠, 병치레가 잦은 연년생 어린애 셋을 키우느라 정신없는 엄마가 미처 못 본 것을 보셨으리라. 어린 나이에 동생을 둘이나 보고 천식으로 골골대는 새까맣고 깡마른 손녀를 보셨으리라.


파리채를 쥐고 방문 뒤에 숨어서 우리 셋을 찰싹 때리며 장난을 쳤던 나의 할아버지

대꼬리로 소주를 드시고 문간에 앉아 담배를 피우시던 할아버지

명절에 괴산 성당을 가면 감색 두루마기를 멋들어지게 차려 입으시고 마당에서 우리를 기다리다가 '이따 보자'했던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거짓말같이 내가 스무살이던 해 무더운 칠월의 마지막날 하늘로 가셨다.


할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김종길 시인의 <성탄제>를 읊는다.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서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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